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관계 (문단 편집) === 2000년대 === [[2000년]] 3월에 김대중 대통령이 대북 지원 확대와 남북 간 화해와 협력 등을 골자로 한 '베를린 선언'을 계기로 남북은 특사를 파견해 물밑 대화를 진행하여 4월에 남북정상회담의 개최가 발표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원래 6월 12일에 북에 도착하려 했지만 북한 정부의 요구로 하루 늦은 6월 13일 오전 10시 20분 [[평양국제비행장]]에 도착하여 북의 김정일이 공항까지 나와 영접했다. 이는 1948년 분단정부 수립 이후 52년만에 처음 있는 경사였다. 그동안 남과 북은 상대방을 부정하고 적대시했는데,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에 들어가는 길목에서 화해와 화합을 큰 걸음을 내딛었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날부터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6월 15일에 두 정상은 [[6.15 남북 공동 선언]]을 발표해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고, 한국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합의했다. 이후 북한은 한국 당국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사실상 지양하고 남북 대화와 협력의 당사자로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전까지 북한이 남측의 재야 인사들과 학생 운동권 등 비정부적 조직들과의 교류를 중시하고 남측 정부에 대해 불신을 감추지 않았던 것에 비해서는 획기적인 선택이었다. 북한이 한국에 대해 입장을 바꾼 것은 어려워진 경제를 회생하기 위해서는 남측의 지원과 협력이 절실하기도 했지만 자신을 적대시하지 않게 된 한국 정부의 태도에 대한 인식을 바꾼 측면도 있다. 6.15 공동성명에 따라 8월 15일에 1985년 이후 15년만에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이 교환되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실현되었고, 9월 2일에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의 북송, 18일에는 [[경의선]] 철도 및 도로 연결 기공식이 있었다. 게다가 남북 간에 각종 교류가 증대되어 남한의 대북 지원이 지속되었다. 남북 간에는 장관급회담, 이산가족 상봉, 경제협력 등 실제적인 교류와 협력이 지속되었다. 특히 2002년 9월에는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착공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11월에 북한은 한국 기업들의 입주를 위한 '개성공업지구법'을 채택했고 2003년 2월 금강산 육로관광 허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면서 남북관계가 순탄하게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정상회담 뒤 북한은 '[[우리민족끼리]]'라는 선언적 구호 아래 민족 내부의 협력을 강조했다. 이와 같은 기조는 민족문제에 대한 외세의 개입을 저지하려는 강력한 정치적 목적을 띤 것이며, 민족의 자주성이라는 고유의 주체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오랜 기간 군사적 한미동맹 관계를 지속해 온 남측으로서는 북측이 주장한 민족 공조를 우선하기는 어려웠으며, 이는 남북관계의 근본적인 진전을 가로막는 주 원인으로 꼽힌다. 남북관계의 발전을 저해하는 기타 내외적 요인들도 적지 않았다. [[2002년]] 6월 [[2002 한일월드컵]] 당시에 또다시 발생한 [[제2연평해전]]은 남북관계를 일시적으로 악화시키기도 했다. 더군다나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출범 이후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은 남북관계의 진전에 계속해서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에 대해 북한은 6.15 공동선언의 틀을 강조하며 이에 근거한 민족 간의 공조를 거듭 주장했으나, 남측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남한 당국에 대해 민족 공조의 측면에서 협력을 강조하면서도 반대로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등 이중적인 입장을 보였다. 2003년부터 국민의 정부에 이어 출범하게 된 참여정부에 들어서도 남북관계는 급격하게 조절되지는 않았다. [[2003년]] [[NPT]]재탈퇴와 [[2006년]] [[북한]]의 핵실험(1차 핵실험, [[북핵문제]])으로 긴장상태가 오가기도 하였고, 대북특검 등으로 약간의 강온조절도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 측면에서의 남북간의 교류는 해가 갈수록 대폭 증대되었다. [[개성공단]]의 경우 2005년에 북측 근로자 수가 6,000여명에 그치던 것이 불과 3년 만에 40,000명으로 증가했고, 같은 기간 생산액은 16배 이상 증대되었다. 남북 간 상호 간의 인적 왕래는 2000년 7,986명에서 2008년에는 186,775명으로 비약적인 증가를 보였다.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국제적 여건이 성숙치 않은 상황 속에서 남과 북은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2007년]] 5월에 경의선 철도 시범 운행이 실시되고 10월에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두 남북 정상은 남북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때 두 정상은 '[[10.4 남북공동선언]](이하 10.4 선언)'에서 2000년 6.15 공동선언을 변함없이 이행하며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할 것을 밝혔다. 또한 남북 양측은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개성-신의주 철도와 개성-평양 고속도로 공동 이용, 백두산 관광 실시, 상시적인 이산가족 상봉 등 획기적으로 쌍방의 협력 확대에 합의했다. 이후 남북총리회담을 비롯한 각 분야의 실무 회담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면서 10.4 선언 이행이 순조롭게 이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2008년에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폐기하고 개방에 나서면 10년 안에 북한의 1인당 국민소득을 3,000달러까지 끌어올릴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이른바 '비핵 개방 3000구상'을 대북 노선으로 견지하였는데, 북한은 이를 '반민족적 대결론'으로 규정해 점차 비판의 강도를 높이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어 암운이 더욱 짙어져갔다. 7월 11일에 [[박왕자 씨 피살사건]]으로 인해 남북교류의 양대산맥[* [[개성공업지구]], [[금강산]].] 중 하나이던 [[금강산]] 관광이 끊겼다. 이 사건은 남북관계를 완전히 수렁으로 밀어넣고 8년간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악화일로를 걷게 만든 대사건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어서 경의선 및 동해선 철도와 도로도 운행을 중단했고 제8회 6.15 민족통일대축전을 마지막으로 6.15/8.15 남북공동행사 역시 중단되었다. 게다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 역시 2010년 11월에 중단하였다. 2008년 12월 1일부로 북한은 개성 관광/경의선 운행, 군사분계선 통행 중단 등의 조치를 취했고, 2009년 1월 17일 북한군 총참모부 대변인이 조선중앙TV에서 군복을 입은 채 '전면 대결 태세'와 NLL 폐기를 언급했으며 30일에는 남북기본합의서 등 정치/군사적 대결 해소와 관련된 모든 합의사항조차 무효화하고 서해 NLL도 폐기한다고도 [[https://m.mk.co.kr/news/politics/view/2009/01/60345/|했다]]. 5월 25일에는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2차 핵실험]]을 감행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