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국시대 (문단 편집) == 남북국시대 개념의 역사 == 신라의 삼국 통일론([[삼국통일전쟁]])은 고려 후기 ~ 조선 중기까지는 크게 지지를 받았고, 발해는 신라와 같은 정통 국가로 인식되지는 않는게 일반적이었다. 《[[고려사]]》에서 발해의 주체를 속말말갈이라고 하였고, 고려가 발해의 영토를 통합하지 못했음에도 태조가 즉위 19년만에 통일삼한(統一三韓)했다고 기록하였다. 《[[삼국유사]]》에서도 발해를 말갈의 무리와 섞인 것으로 서술해 신라에게 정통성을 부여하였고 신라가 일통삼한(一統三韓)했다고 명시했다. 고려 말의 《[[제왕운기]]》나 《고려도경》 등에서 고구려와 고려 사이의 계보로 발해가 들어가기도 하지만 조선 초기의 《[[동국통감]]》에서는 고려 태조의 대 거란 정책을 비판하면서 우리 민족과 발해의 연관성을 부정하였다. 비로소 신라 통일론에 있어서 본격적으로 반대적인 시각이 뚜렷히 드러난 건 조선 중기로, 가장 먼저 지적된 것은 영토의 불완전성 문제인데, 조선 중기의 한백겸(韓百謙)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에서 이런 면을 [[수도(행정구역)|수도]]의 위치와 연관시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정할 때는 그 규모가 크지 않으면 안 되며, 그 형세를 잘 살펴야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합한 초기에 당군이 철수한 뒤 수도를 국토의 중앙 지역으로 옮겨 사방을 제압하였다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할 수 있어, [[부여]]와 요양 심양 지역을 우리 판도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어찌 저 거란이나 [[여진족]](女眞)이 홀로 그 땅을 마음대로 차지할 수 있었겠는가. > >신라의 군신이 일이 성사되자 쉽게 만족하여 한 모서리에 안주하여 당장의 안전을 추구하며 나날을 보내고, 서북 지역 태반을 헌신짝 버리듯 인접한 적들에게 내주어, 마침내 그 뒤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7백여 년간 계속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어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으니, 어찌 가히 탄식치 않으리오. >---- > 《[[동국지리지]]》 中 한백겸은 신라 지배층이 안정책을 취해 고구려의 옛 땅을 방기한 것을 비판하면서, 고구려 영토의 태반을 포기한 점이 결국 나라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며 불만스러운 점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는 신라의 삼국 통일 자체는 부정하지 않았다. 18세기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에서 통일신라의 정통성을 인정했지만,[* 안정복은 신라가 삼국 중 한 나라이던 시기는 한국사의 정통이 아니었고, 통일하면서 정통성을 가졌다고 보았다.] [[9주 5소경]]을 기술하면서, 위에 제시된 한백겸의 글을 인용하였다. 안정복도 고구려 영역 통합의 불완정성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것. 신라 삼국 통일론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 것은 조선 후기,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다.[* 즉, 근현대에 와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성장에 의해 발생한 불만이 아니라 이미 조선 시대부터 그 문제 의식이 생겨나고 있었다.]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옛날에 고씨가 북쪽에 거주하여 고구려라 하였고, 부여씨가 서남쪽에 거주하면서 백제라 하였으며, 박·석·김 씨가 동남쪽에 거주하여 신라라 하였다. 이것이 삼국으로 마땅히 삼국사가 있어야 했는데 고려가 이를 편찬하였으니, 옳은 일이다. >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 >무릇 대씨가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의 땅으로, 동쪽과 서쪽, 북쪽을 개척하여 (고구려의 영역)보다 더 넒었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가 망한 뒤에 왕씨가 이를 통합하여 고려라 하였는데, 남쪽으로 김씨의 땅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지만, 북쪽으로는 대씨의 땅을 모두 소유하지 못하여, 그 나머지가 여진에 들어가기도 하고 거란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 >[[유득공]](柳得恭), [[1784년]], 《[[발해고]](渤海考)》 서문 유득공은 남북국시대론을 개진하면서 고려 통일의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이는 결국 신라 삼국 통일론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라 통일의 불완정성을 논하는 것은 결국 고구려의 영토를 신라가 제대로 통합하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우리나라가 약소국이 되었다'''는 식의 인식과 연결되었다. 이런 인식이 근대에 들어와 민족주의와 연결되어 신라 통일론을 비판하고 남북국시대론을 진전시켰다. 그러면서 신라가 외세와 결탁하여 동족을 팔아먹었다는 식의 비자주성, 비민족성을 강조하여 비판하게 된 것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단재신채호.jpg|width=100%]]}}}|| ||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 [[신채호]]가 1908년에 발표한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그는 신라의 통일을 부정하고, 신라와 발해의 양국 시대를 주장하였으며, '''이종(異種)을 불러 동종(同種)을 멸함은 도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임과 다를 바 없는''' 행위라면서 신라의 통합 전쟁을 비난하였다. 신라가 민족적 역량과 영토의 축소를 가져왔으며, 외세와 결탁한 반민족적 행위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독소를 심었다는 것이다. 삼국통일론과 남북국시대론을 둘러싼 논의에서, '민족'이 핵심 화두가 되었다. 역사의 도덕화, 이념화는 민족주의 사학의 주요 특성이고, 이에 따른 신라 통일론 비판과 남북국시대론의 강조의 사론은 20세기에 꾸준히 이어졌다. 그런가 하면 삼국시대에는 아직 민족 관념이 성립하지도 않았다면서 민족 관념으로 삼국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신라 통일론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671년, 당나라 장수 [[설인귀]]가 보낸 문무왕의 서한에서 언급한, 대동강 이남 지역을 신라 영토로 한다는 [[태종 무열왕|무열왕]]과 [[태종(당)|당태종]]의 합의를 주된 논거로 하여, 신라 조정의 전쟁 목적이 '''삼국 통일이 아닌 백제의 병합'''이었다고 파악하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 설에서는 신라가 고구려 영역을 온전히 통합하지 못한 것은 본래 의도부터가 그러한 만큼, 이에 대한 비판은 삼국 통일론에 집착함으로서 야기된 자승자박적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남북국시대를 깊이 추구하다 보면 결국 통일신라라는 명칭에 대해 거부감을 보일 수 밖에 없고, 이에 따라 7세기 말 이후의 신라 국가의 명칭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유득공, 신채호등의 민족주의 관점에서 통일신라를 부정하고 발해를 통일신라와 동등한 민족국가로 간주하거나 신라보다 오히려 발해의 민족적 정통성과 자주성을 높이 평가해 남북국시대로 인정하면 논리적 모순이 생긴다. 즉 통일신라 개념을 유지한 상태에서는 요동을 상실한 민족적 쇠퇴의 책임을 통일신라에게 상당부분 물을 수 있겠으나, 민족적 정통성을 나눠가진 남북국 관점으로 보면 발해 멸망 후 [* 정안국같은 발해 부흥 운동은 있었다] 한반도 깊숙한 곳에 수도를 둔 남쪽의 왕조(신라-고려-조선)처럼 면면히 계속되는 민족 국가를 만들지 못하고 중국과 유목민족에 동화[* 세계사를 보면 국가의 흥망성쇠는 자연스러운 것이라 민족사적으로 보면 발해가 망한 것은 언어와 민족 정체성을 잃은 것과 비교하면 사소한 것이다. 실제 이집트에 끌려간 이스라엘 민족이나 쿠르드, 유럽의 발칸 소수민족은 국가 없이 수천년간 지배당하면서도 민족성을 지킨 사례가 있고 여진족만해도 고구려, 거란(요나라), 몽골(원나라), 명나라 같은 다양한(반농, 유목, 농경) 이민족 국가의 지배를 천 년 이상 받았으면서도 민족성을 지켜 결국 금, 후금(청)을 건국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만 보면 한족의 정복보다는 오히려 이민족 왕조로 중국 대륙을 정복했을 때 한족으로 동화된 사례가 많다. 만약 발해인이 민족성을 유지했다면 후금이 아니라 후발해가 건국됐을지도 모를 일이다.]되어 민족의 판도에서 요동을 상실한 것은 이유야 어떻든 결국 발해인과 그 후손의 직접적 책임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아르메니아, 발칸 제민족 사례를 봐도 국가의 멸망과 독자적인 민족집단의 소멸은 완전히 다르므로 한족(漢族)과 유목민에 동화되어 민족성을 영원히 상실한 발해인의 책임을 거란군의 강력함으로 면죄부를 주려는 발상은 어불성설이다. 5호 16국처럼 중국을 정복했다가 오히려 漢族 문화에 동화되어 민족성을 상실한 유목 정복왕조는 많으나 발해처럼 피정복, 국가 멸망으로 민족성을 상실한 예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동아시아에서 정복으로 인한 민족성이 상실된 거의 유일한 사례는 건륭제가 멸족시킨 준가르가 있으나 그조차 러시아로 도망간 준가르 후손들은 현재 러시아 칼미키야 공화국에서 유럽에서 유일하게 불교 문화를 지키며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 등에서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시각이 7세기 이전의 이른 시기에 한국 민족이 형성되어 있었고, 삼국이 중국과는 구분되는 소위 해동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식이다. 그런 인식에 의거하면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죄악의 행위이며, 그나마 온전히 통합하지 못하고 남은 일부가 따로 나라를 세웠으니, 이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도 역시 상당하다. [[삼국통일전쟁#s-2.2|삼국통일전쟁]] 문서의 해당 부분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