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분단 (문단 편집) === 남북한 정부 수립 === 남북분단의 조짐이 심화되자, [[미국]]에 의해 한반도 문제는 [[UN]]소총회로 이관되었고, 1947년 11월 14일, UN은 한반도 전체를 대상으로 선거가 열려야 하고, 선거를 관리하는 유엔한국임시위원회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소련은 UN이 주관하는 선거가 공정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위원단의 입국을 거부하며 남북총선거를 거부하였다.[* 실상은 북한 지역보다 인구가 2배 넘게 많은 남한 지역을 우익이 장악했기 때문에 한반도 전역에서 선거를 치르면 자신들이 선거에서 패할 것임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유엔]] 한국위원단에 참석했던 이승만은 [[미국]]과 [[유엔]]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남한 단독으로 선거를 실시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남한의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인사들도 그에 동조하였다. 이에 백범 [[김구]]는 [[이승만]]의 이같은 주장을 반박하여 남북한이 함께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타당하며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였다. 이어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단독정부를 합의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김구는 해방 당시만 하더라도 [[이승만]], [[한민당]]과 입장을 같이 하여 신탁통치에도 반대하였고 이승만의 정읍발언도 지지하였으나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 이후로는 [[이승만]] 세력과 결별한다.] 결국 UN이 주관하는 선거는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남한]] 지역 단독으로 진행되었다. 7월 17일에는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되었으며, 7월 20일에는 대한민국 제헌 국회는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고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그 해 ''''9월 9일'''' 한반도 북부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됨에 따라 남북분단은 사실상 확정되었다.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무력통일하고자 하였으나 낙동강 대치와 [[미군]]의 [[인천상륙작전|개입]]으로 실패하였고, 대한민국은 북한 공격을 방어하는 데에 성공한 뒤 미군, [[유엔군사령부|유엔군]]과 함께 38선을 넘어 통일을 시도하였으나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실패한다. 전황은 일방적으로 한 쪽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았고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 협정]]을 맺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