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남북전쟁 (문단 편집) === "유혈의 캔자스" (Bleeding Kansas) === 그럼에도 캔자스에서는 노예제가 별로 인기가 없었고, 그 캔자스를 노예주로 만들기 위하여 바로 옆 주였던 [[미주리]]에 사는 노예 주인들이 대거 캔자스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를 막기 위해 이번에는 북부의 노예 해방운동가들이 대거 캔자스로 이동하며 맞불을 놓았다. 이들 모두 무장을 한채 왔고 개중엔 심지어 대포를 끌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양쪽 모두 개표 조작과 협박을 서슴지 않았고, 결국 미주리 상원의원까지 합세해 부정선거를 한 끝에 캔자스는 노예주가 되었다. 하지만 이미 캔자스 땅의 대부분의 농부들과 주민들은 노예주의자가 아니었다. 결국 또 문제가 터지는데 캔자스가 노예주가 되기 전부터 존재했던 자유주의 마을 로렌스가 노예제 지지자들에게 약탈당해 마을의 중심지에 있던 프리 스테이트 호텔이 불태워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로렌스 약탈, Sacking of Lawrence). 여기에 원래는 온건한 노예제 폐지론자였으나, 찰스 섬너(Charles Sumner) 의원의 피습사태 등을 지켜보고 유혈혁명만이 노예해방의 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존 브라운]](John Brown)이라는 사람이 아들들과 지지자들을 규합해서 연방정부의 무장창을 습격해서 흑인노예들을 무장시키려고 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남부 노예주들은 '북부 자유주들이 흑인 노예들을 자극해서 인종 대전쟁을 일으켜 우리를 다 죽이려고 한다.'라는 의심병이 더 심해지고, 북부 자유주들은 '중앙정부도 노예제 편이다. 정부를 갈아치워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어버렸다. 1855년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은 노예제 찬성파가 소집한 의회를 승인하고, 노예제 반대파가 토피카에 만든 '그림자 주정부'와 기본법(토피카 기본법)을 불허하였다. 1857년엔 후임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 역시 노예제 찬성파들이 만든 기본법(르컴튼 기본법)을 승인하였으나, 르컴튼 기본법은 스티븐 더글러스도 반대할 만큼 막장인 법률이었다. 결국 연방 의회가 캔자스의 재선거를 명령하였고, 외부 유입된 극렬 노예제 찬성파들이 그 재선거를 보이콧함으로써 결국 1859년 노예제 폐지자들에 의한 와이앤도트 기본법이 캔자스의 헌장으로서 승인되었다. 과연 외부 유입이 사라진 캔자스 내부 표결로는 찬반이 2:1이었다. 결국 캔자스는 1861년 1월 19일 자유주로 승격되었고, 그해 4월에 벌어진 남북전쟁에도 북부로 있었다.[* [[네브래스카]]는 오래 전부터 자유주로 결론이 났지만, 남북전쟁 때문에 가입이 미뤄져 1867년에야 가입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