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남북전쟁 (문단 편집) === 전쟁 발발 이후 중남부 지역의 동향 === 전쟁이 시작되자 링컨은 아직 연방을 탈퇴하지 않은 남부 주들을 포함해 모든 주들에 남부 반란 진압을 위한 민병대 소집을 요구했다. 이에 반발하여 [[버지니아 주|버지니아]], [[노스 캐롤라이나]], [[테네시]], [[아칸소]]가 남부에 가담하게 되었으며,[* 버지니아와 테네시는 1860년 선거에서 분리주의를 반대하는 존 벨을 지지하는 등 앞서 연방을 탈퇴한 주들에 비해 유보적인 성향을 보였다. 특히 앞의 세 주는 기존 남부연맹(미연합국) 주들보다 인구가 많은 편이어서 남부연맹은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를 수도로 정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해당 주들은 전쟁 발발 이후 남부연맹의 동원력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버지니아의 리치먼드는 곧 신생 남부연합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노예제 허용주들이 남부로 간 것은 아닌데 '''버지니아의 서부'''([[웨스트 버지니아]]), [[델라웨어 주]], [[켄터키]], [[미주리]], [[메릴랜드]]는 연방에 잔류했다. 이렇게 연방에 잔류한 노예제 허용주를 '경계 주'(border states)라고 부른다. 마침 이들 경계 주는 정치적 의미 뿐만 아니라 실제 지리적으로도 기존 연방과 남부연합의 경계에 속했다. * 버지니아 주의 서부와 동부는 차이가 극심했다. 산악지대인 서부는 산업이 발달하고 대농장과 노예가 별로 없었던 반면, 동부는 남부의 다른 주에 노예를 판매해서 수익을 얻었다. 주 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것은 동부 쪽이었는데, 전쟁이 시작되자 서부쪽에서 연방에 잔류하고 따로 주를 만들자는 분리 움직임이 일어나 1862년 12월 31일자로 링컨 대통령이 웨스트 버지니아 주 창설에 서명하게 되었다. 완전히 공인된 것은 전쟁 후. 버지니아는 전쟁 기간 남부의 중심지인 동시에 주 자체로 봐도 서부 지역이 북부에 떨어지고 남은 지역이었으니 그야말로 순도 100% 알짜배기 노예주였던 셈이다. 이런 연고로 버지니아는 [[1960년대]]까지 인종차별이 극심했다. 그런데 웬걸,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웨스트 버지니아의 광공업은 점차 쇠락하면서 웨스트 버지니아가 깡촌, 반대로 [[알링턴]]을 위시로 한 메트로 [[워싱턴 DC]] 북버지니아 지역이 도시지역으로 개발되면서 버지니아가 도시지역이 되었고, 정치 상황도 뒤바뀌어버렸다. 그런데 마침 공화당도 보수정당으로, 민주당도 진보정당으로 자리를 맞바꾸면서 지지정당은 유지되었다. * 델라웨어 주는 주민투표 결과 연방을 탈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델라웨어는 노예주였지만 노예주나 노예의 수도 적고 펜실베이니아나 뉴저지 등 북부 자유주와 경제적 교류가 잦은 주였다. 또한 [[미국 헌법]]을 최초로 승인하고 미 연방에 최초로 가입한 주라 연방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주이기도 했다. 그래서 연방 탈퇴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작았다. 당시 주지사 윌리엄 버튼(William Burton)이 "우리 주는 제일 처음 연방에 가입했으니 탈퇴하더라도 가장 마지막에 탈퇴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 메릴랜드 주는 노예주였으나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고 노예주들이 풀어줘 자유인이 된 흑인들의 수도 많았다.[* 1860년 당시 메릴랜드 흑인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49%가 자유인이었다.] 한편으로는 노예제를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많아 중도 성향의 주였다. 문제는 메릴랜드가 수도 워싱턴 D.C.를 둘러싼 주이며 남부로 가기 위해서는 메릴랜드를 반드시 지나가야 했다는 것. 그래서 북부주 출신 연방군이 반란 진압을 위해 메릴랜드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접하자 남부를 지지하는 이들이 연방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키고 다리를 불태우는 일이 벌어졌는데, 남부 정부에서 사태를 파악하기 전에 링컨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군을 파견하여 메릴랜드 주와 컬럼비아 특별구를 장악하고 분리주의자들을 모두 재판없이 구금시켰다. 구금된 이들은 나중에 석방되었다. 당시 주지사 토머스 힉스(Thomas Holiday Hicks)가 이끄던 메릴랜드 주정부는 노예제 폐지에는 반대했으나 연방정부에는 협조하면서 메릴랜드는 그대로 연방에 잔류했다. 만약 메릴랜드가 연방을 탈퇴하고 남부에 가담했으면 북부는 최소한 수도를 이전한 상태로 전쟁을 시작해야 했을 것이다. 아니면 전쟁을 통해 메릴랜드 주를 점령하거나. * 켄터키 주는 전쟁 초기에는 중립을 표방하다가, 이후 남부가 켄터키 주의 콜럼버스를 침공하자 연방 측으로 가담했다. 정작 이 침입은 남부 장군 레오니다스 포크(Leonidas Polk)가 테네시 주에서 방어선 구축 중 남부 정부의 명령도 없이 멋대로 들어간 삽질이었다. 자세한 과정은 다소 복잡한데, 링컨은 "신이 우리 편이었으면 좋겠지만 켄터키는 반드시 가져야 한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켄터키를 중요시했고, 켄터키를 자극하지 않고 연방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켄터키에 의용군을 요구하지도, 연방 병력을 주둔시키지도 않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주지사 마고핀(Beriah Magoffin)은 친남부주의자로 남부를 진압하기 위한 군대에 단 한 명의 병사도 보낼 수 없다고 공언했지만, 전쟁 초기 켄터키의 주된 여론은 켄터키 출신인 [[헨리 클레이]]의 전통을 따라 남부와 북부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성 연방파와 강성 친남부파는 켄터키가 중립을 선언한 동안에도 주를 빠져나가 각각 북군, 남군에 미리 합류했다. 남부연합 지지파가 주를 빠져나간 것은 1861년 6월 켄터키 연방하원의원 선거와 8월의 주의원 선거에서 연방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대승을 이끌었다. 선거 이후 연방파 주의회는 마고핀 주지사의 거부권을 찍어누를 수 있는 절대다수 의석을 손에 넣었다. 1861년 9월 포크가 콜럼버스를 침공한 직후 북군의 [[율리시스 S. 그랜트]] 또한 켄터키 주경계를 넘어왔지만, 주의회는 포크의 남군에게만 철수를 요구했다. 주의회는 주도 프랭크퍼트에 성조기를 게양하여 연방 잔류 의사를 명백히 했고, 곧 북군과 남군 양쪽이 켄터키 곳곳을 요새화하여 켄터키는 주요 전장이 되었다. 헨리 클레이의 손자 7명 중 3명이 북군, 4명이 남군에 가담하는 등 켄터키는 전쟁에서 가장 분열된 주 중 하나였다. * 미주리 주의 경우 당시 주지사 클레이본 잭슨(Claiborne Jackson)은 연방 탈퇴를 선호했으나 탈퇴 여부를 특별위원회의 표결에 부쳤는데 압도적인 표차[* 잔류 98표에 탈퇴 1표. --비추실명제--]로 연방 잔류 결정이 나왔다. 그래서 미주리는 일단 중립을 표방했으나 잭슨 주지사는 비밀리에 남부 정부와 연락하며 주 정부를 쿠데타로 엎어버리고 남부에 가담할 계획을 세웠다. 이걸 미주리 주에 주둔하고 있던 연방군이 알아채 친북부 민병대와 합세, 주지사의 지휘를 받는 주방위군과 친남부 민병대를 상대로 무력 충돌을 벌였다. 여기서 연방군이 승리해 주를 장악했고 잔류주의자들이 장악한 주 정부는 연방 잔류를 선언했다. 쫓겨난 잭슨 주지사와 분리주의자들은 대립 주정부를 세우고는 연방 탈퇴 및 남부 가담을 선언했으나 이미 연방군이 주 대부분을 장악한 상태에서 별 소용이 없었다. [[앤드루 존슨]]의 지역 기반이기도 했던 테네시주 동부의 경우 버지니아주 서부와 비슷한 [[애팔래치아 산맥]] 지역으로, 연방 탈퇴를 반대하는 주장이 우세했다. 링컨은 이들을 지원하고 웨스트버지니아처럼 연방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했으나, 워낙 교통이 불편하고 남부연합 지지파에 둘러싸인 지역이어서 연방군의 지원이 닿기가 매우 어려웠다. 결국 남부연합은 1863년 중반까지 동부 테네시를 세력권으로 두는 데 성공했고, 게릴라 전투와 연방 지지파 테네시인들에 대한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파일:attachment/a0011675_4959828a6714b.png]] 파란색이 북부, 붉은색이 남부. 연보라색은 연방에 잔류한 노예제 허용주인데 이를 경계 주(Border States)라고 한다. 흰색은 아직 주로 승격되지 않은 영토(Territory)로써, 인구가 많지 않고[* 영토가 하나의 주로 승격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 "현재 있는 주들중 가장 적은 인구수를 가진 주보다 더 인구수가 많을 것"이다. [[2017년]] 기준으로는 [[와이오밍]] 인구가 기준이고, 저 당시에는 보통 인구 5만 ~ 6만 명을 기준으로 했다.] 산업기반도 그리 발달하지 않은 지방이다. [[파일:attachment/남북전쟁/civil_war_map.jpg|width=590]] 좀 더 정확한 지도. 정확히는 1863년 웨스트 버지니아가 분리되고 1864년 [[네바다]] 주가 승격된 최종 국면의 지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