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전쟁 (문단 편집) === [[미국|미합중국]](북부연방) === || [[파일:미국 국기(1861-1863).svg|width=50%]] || || United States of America[* 별이 34개로, 현재의 국기와는 별의 개수가 다르다.] || 북부, 곧 미 연방은 정부조직이 이미 잘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체제에 익숙해져 있었고 따라서 의사결정이 신속하고 유연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그래서 물자 동원도 훨씬 수월했다. 국력도 공업의 발전으로 전쟁물자 생산에서 우세했는데 당시 총기생산량의 97%가 북부에서 나왔다. 여기에 힘입어 북군은 [[미니에 탄]] 등 당시로서는 최신 기술을 많이 도입하여 더 우월한 무장을 갖출 수 있었다. 반면 남군은 총기를 비롯한 각종 무기를 갖추는 데에 애로점이 있었다. 여기다 전쟁 중에 4,000km 이상의 [[철도]]를 가설했고, 기존의 철도망도 계엄령을 통해서 국유화를 실행한 결과 잘 갖추어진 철도망과 효율적인 운용 덕분에 병력이나 물자 수송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인구의 측면에서도 압도적이라 농업이 주 산업인 남부보다 식량 생산량이 많았고 인구는 4배나 차이가 났다. 당시 북부의 농장들에는 당시로서는 최신식인 [[콤바인]]이 도입되었으며 덕분에 주요 노동 인구였던 남성들이 군대로 빠져나갔어도 남은 여성들만으로도 충분히 농업 활동이 가능하여 그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아 전시 중에도 영국에 식량을 수출할 정도였다. 남부 또한 농업 비중이 높았고 대부분이 목화, 담배와 같은 상품 작물이었으나 식량자급을 할만큼 생산량은 충분했다. 그러나 철도망의 부족과 철도에 여러 궤를 같이 쓴 것 등 식랑 수송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이는 분명히 북군에 비해 불리한 요소였다. 즉 남부가 상품작물 위주로 생산해서 식량이 모자랐다는 건 틀렸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북부가 식량 공급에 유리했다. 자유민 인구만 따져도 4:1로 연방이 우세했는데, 당시 미국의 주요 항구가 모조리 북부 손에 있었고 제해권도 북군이 장악했기에 유럽에서 넘어오는 이민자들은 전부 다 북부로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미합중국 정부는 전쟁중에도 지속적으로 이민을 받았고 도착한 이민자들은 돈받고 정착하는 대가로 북군에 입대해 싸웠으므로 병력 차가 더 벌어지게 된다. 다만 이로 인해 북군의 병사의 질은 남군보다 낮았으며 이는 초반의 남군의 선전과 양측 전사자 비율 격차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민자 출신을 마구 군대에 넣어서 사기가 형편없을 것이라는 편견과는 다르게 북군의 사기는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아일랜드인들 다음으로 남북전쟁에서 가장 많이 자발적으로 참전한 병사들이 독일 이민자 출신 병사들이었는데 이들은 유럽의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열렬하게 노예 해방을 지지했다. 모든 북부 병사들이 노예해방을 찬성하는 건 아니었지만, 많은 병사들이 남북전쟁을 노예 해방을 위한 성전이라고 여겼다. 북부(연방)측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인 "[[Battle Hymn of the Republic]]"를 들어보면 이해가 쉽다. "As He died to make men holy, let us die to make men free."([[예수님|그 분]]께서 죽으시사 인류를 거룩케 하셨듯, 우리도 죽어 인류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가사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일개 병사가 고향에 '우리 군대는 우리 선조들보다 좀 더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우리는 다른 인종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고 있다.'같이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이고 계몽된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는 당시 유럽의 정치사회적 분위기에서 이해해야 할 문제인데,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불과 십여년 전 유럽에서는 (결국에는 실패했지만) [[1848년 혁명]]이 일으킨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의 물결이 전 유럽을 휩쓸어버린 바 있다. 특히 독일의 사례를 보면 [[3월 혁명]]의 실패에 실망한 사람들이 대거 신대륙으로의 이민을 선택했음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목표로 제시하고, [[사회주의]]적 경향까지 그 맹아를 드러내기 시작한 혁명의 실패에 실망하여 이민을 선택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노예 해방이라는 북부측의 대의를 강경히 지지했을 확률이 지극히 높은 것이다. 특히 지식인 계층에서 이러한 지지는 명확하여, 변호사 출신의 정치인으로 48년 혁명 당시 독일의 혁명가이자 연설자로 이름을 날렸던 프리드리히 해커 같은 인물은 혁명의 실패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남북전쟁 당시에는 북군 대령(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또한 유럽에 남아있던 이들 사이에도 북부에 대한 지지는 명확하여, 독일 혁명의 진행과정에서 해커와 심하게 사이가 틀어졌던 [[카를 마르크스]] 같은 인물조차 그가 미국 이주 후 북군 소속으로 참전했다는 소식에 과거의 앙금을 털어내고 현재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지지의사를 보였다고 할 정도.]. 당시 북부인들은 교육 수준과 문자 해독율이 전반적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었고, 미국 특유의 민주주의(그리고 그것을 대표하는 연방)에 대한 자부심도 매우 높았다. 미 연방과 미국 독립전쟁으로 탄생한 정부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열기는 고향을 수호하는 남군의 전투의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도망 노예들이 북군에서 복무를 시작하자 안 그래도 우위였던 수적인 우세가 더 강화되었다. [[매사추세츠]] 주에서 편성된 제54 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54th Massachusetts Volunteer Infantry)가 대표적인 흑인 부대였다. 이들을 다룬 영화로 1989년에 개봉한 영광(Glory, 국내개봉명은 [[영광의 깃발]])이 있다. 와그너 요새 전투에서 54연대의 선전으로[* 남북전쟁의 시발점인 섬터 요새가 위치한 찰스턴 항을 방어하는 요새 중 하나였던 와그너 요새는 북군이 찰스턴 항을 점령하기 위해 수차례 공격했지만 전쟁이 끝날 때 까지 함락되지 않고 버티는데 성공했다.] 이후 흑인들의 모병이 적극적으로 시작되었고 18만명의 흑인들이 입대하여 복무하였다. 54연대는 [[프레드릭 더글러스]][* 그의 아들도 입대하였다.]와 같은 당시 노예제 폐지운동계에 활동하던 유명인사들이 징집운동을 하기 위해 자원하던 것으로 유명했으며, 미군 최초의 유색인종 [[부사관]]이자 역시 최초로 유색인종으로 [[명예 훈장]]을 받은 월리엄 H. 카니 [[상사(계급)|상사]]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의회 명예 훈장은 전쟁이 끝나고 35년이 지난 1900년에 수여되었다. 상사는 국기를 들고 돌격하였으며 적의 진지에서 저항하다 퇴각 과정에서 4발의 총탄을 맞았지만 다른 병사들을 무사히 퇴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북군에는 전쟁 시작 때 육군 16,000명, 해군은 7,600명, 42척의 전함이 있었다. 그 방대한 영토를 지키기에는 군대의 규모가 너무 적었는데, 이는 민병대 전통이 강했던 미국에서 연방 중심의 상비군은 소수만을 유지했었고, [[미국-멕시코 전쟁]]을 끝으로 주변에서 미국에 대결할만한 강국 자체가 사라져서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기 역시 미국 독립전쟁 때 쓰던 구식조차 더러 섞여있었다. 그러다보니 얼마 전에 해외 원정까지 한 국가라고 하기에는 매우 적은 군대만 존재했고 전반적으로 병력의 질이나 경험도 장담하기는 어려웠다. 장교단의 질이 군사학교가 위치해있던 버지니아가 남부로 가고 남부 출신 장군들이 고향을 위해 싸우겠다며 남부로 가서 질이 떨어졌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래에서 후술하겠지만 웨스트포인트를 비롯해서 대부분 장교단은 2:1~3:1 비율로 북군쪽에 더 많이 남았다. 당시 상술했듯이 대규모 상비군을 유지하고 있지 않던터라 사단이나 여단을 지휘할 수 있는 중견급 장교단에 전투경험이 없고 인맥을 사용하여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전술, 전략적 식견이 떨어지는데 정치적 대의를 부르짖으며 무리하게 기동하거나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기동했다. 또한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남아있던 육군 최상급 지휘관의 경우 나이가 너무 많았다. 북군의 최고사령관 윈필드 스콧은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해군을 활용하여 멕시코시티를 점령하는 등 굉장한 능력자였지만 남북전쟁 발발시점에서는 완전한 노인장으로 야전지휘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북군은 남군보다 장교 숫자도 많았지만 남부연합의 존스턴, 보우리가드, 리, 잭슨같은 명장들에 비해 적극적인 전술구사 능력이 매우 떨어졌었다. 하지만 육군과 달리 해군 장교진은 북군이 압도적이었다. 대부분의 원로 장교들이 남부 해군이 아닌 북부 해군에 잔류했었고 그 덕에 중공업 산업시설을 기반으로 찍어낸 해군을 통해 효과적인 봉쇄작전을 계획할 수 있었지만 전쟁초기 주요 해군기지인 노퍽이 남군에 넘어가며 다수의 주력함을 자침해야했다. 객관적으로 남부보다 국력이 우세했지만 연방도 전쟁 준비가 안 되었고 그 우세를 전쟁에서 실제로 가용하게 동원하려면 시간이 걸렸기에 전쟁 발발 시점에선 남부에 비해서 딱히 우세하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북군 장교단의 진짜 문제는 정치군인의 존재였다. 링컨은 북부의 여러 정치 세력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야전군사령관과 같은 고위 직책에 군사 경험이 없는 정치인 출신 인물들을 임명하는 일이 많았고, 이들은 거의 항상 무능한 지휘로 북군의 수적 우세를 말아먹었다. 하지만 이는 군사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어쩔 수 없었던 측면도 있는데, 미국의 [[미국 독립 전쟁|역사적 전통]]과 [[민주주의|정치체제]]를 고려한다면 가장 민감한 권력수단인 군사력에 관해서도 지분을 [[문민통제|보장해줄 필요]]가 있었다.[* 이 내전 전이나 후나 [[상비군]]의 존재를 극도로 경계하였다. 특히 뭍의 향토방어와는 직접적 관련이 적으면서 돈은 많이 잡아먹는 해군의 경우, 그 필요성이나 여러 전쟁과 대외분쟁에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독립전쟁 이후에는 아예 해체되었으며 [[미영전쟁]]이나 [[1차 바르바리 전쟁]] 등에서도 해체나 군축의 위기를 겪다가 이 내전 직전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상비전력을 보유하고 [[증기선]]과 [[철갑선]]도 도입할 수 있었을만큼 예산 편성도 인색하였다.] 오늘날 [[의원내각제]] [[연립정부]]에서 정당별로 [[내각]]에서 자리를 나누어 맡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당시 인사체계가 [[엽관제]]로 운영되었으므로 군대를 포함한 여러 공직도 정당별로 분배한 것이었다. 따라서 링컨은 민주당 전쟁파나 [[공화당 급진파]] 등 자신의 반대파를 회유하기 위해서, 혹은 프란츠 사이겔(Franz Sigel) 등 일부 독일계 인사들처럼 독일인 이민자들을 징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기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남부연합측도 마찬가지여서, 대통령 데이비스와 친한 장군들을 중용하거나 경계주 주민들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 정치인 출신 장군들을 임명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존 C. 브레킨리지]]가 있다. 북부의 목표는 연방의 재통일과 반란군인 남부의 진압이었다. 전략 목표는 명확하게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였다. 북부의 대전략은 전쟁 시작 당시의 북군 총사령관이었던 윈필드 스콧 장군[* 1812년 영국과의 전쟁에도 참전한 노장으로 당시에 이미 74세였다. 이 사람도 버지니아 주 출신이지만 연방군에 계속 남았다.]이 남부를 경제적으로 말려버리기 위해 입안한 소위 [[아나콘다]] 계획(Anaconda Plan)이 중심이었다. 남부의 전 해상을 봉쇄한 후 미시시피 강을 장악하여 남부를 동/서로 쪼개는 것이 그 골자였다. 이론적으로 매우 타당한 계획이지만 남부를 포위하기 위해 장기간의 봉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자원이 많이 든다는 게 문제였다. 이에 빠르게 전쟁을 끝낼 목적으로 남부연합의 수도 리치먼드가 있는 동부의 주공 방향에서 단기결전 형태의 육상 작전들이 입안되었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개틀링 기관총|방어용 화력이 급속도로 발전]]한 것을 도외시한 공세 작전들이 입안된 탓에 전쟁을 초기단계에 해결할 희망이 불런 전투에서의 패배로 막혀버리고 점점 더 지지부진하게 끄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 계획은 나중에 스콧의 뒤를 이은 조지 B. 매클레런(George B. McClellan)[* 자칭 나폴레옹이었는데 군사적 재능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막상 전선에 나서면 리에게 끌려다니는 게 일상이어서 결국 조셉 후커로 교체되었다. 매클레런은 이 일에 앙심을 품었는지 1864년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고 여기서 패배하자 곧바로 유럽으로 떠나버렸다.]이 실행에 옮겼으며, 이로 인하여 남부의 수출/수입량의 95%가 막혔다. 정리하면 동부에서 적극적인 공세로 남군의 주력을 붙들어 매면서 수도인 리치먼드를 공략하는 동시에 연방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방어하고, 서부는 대전략의 핵심으로 서부 남부주들의 물자가 동부로 넘어가는 것을 막는 한편 서부의 주를 탈환해서 남부의 전쟁 수행 역량 자체를 감소시키는 데 있었다. 수도인 워싱턴 D.C.가 최전선에 근접하다보니 남군이 약간만 북진하는 것으로도 정치적, 군사적으로 위기에 처한다는 게 전략적으로 약점이었다. 다만 여기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인데, [[서울|워싱턴 D.C.가 최전선에 근접하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안전했다.]] 남북전쟁 발발 이전부터 연방군은 이미 버지니아 북부 지역을 점령해서 요새화하고 있었고, 남군은 이 북부 지역의 방어선을 뚫는데 굉장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남군은 메릴랜드, 펜실베이니아 쪽으로 우회해서 워싱턴 D.C.를 포위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앤티텀 전투와 게티즈버그 전투도 이 과정에서 벌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