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전쟁 (문단 편집) === [[아메리카 연합국|미연합국]](남부연합) === || [[파일:아메리카 연합국 국기(1861-1863).svg|width=50%]] || ||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보통 사람들은 주로 X자 모양 안에 13개의 별이 박혀있는 깃발이 [[아메리카 연합국]]의 국기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군기(Confederate Battle Flag)이자 후기 국기이다. 위와 같이 적, 백, 적색 순서의 문양 및 좌측 위의 푸른 바탕에 13개의 별이 원을 만드는 깃발이 초기의 [[아메리카 연합국]]의 국기이다([[https://en.wikipedia.org/wiki/Flags_of_the_Confederate_States_of_America|관련 문서]]).] || [[아메리카 연합국]], 일명 남부연합은 태생부터가 주의 발언권과 자주성에 의거해 탈퇴한 주들이 모여 결성된 만큼 각 주들의 발언권이 상당히 강력한 지방자치제 국가였다. [[콩가루 집안|이로 인해 새로 구성된 정부조직은 주 정부들에게 권력을 휘두르기 어려웠고 아예 주 정부들이 중앙 정부의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가령 애틀랜타가 북군에 포위당했을 때 과감하게 포기하지 못하고, 그때까지 잘 먹히던 '상대방을 자신들이 구축한 진지로 끌여들여 조금씩 피해를 주던 방식'을 버린 다음 전면적인 역공을 강행해야 했다.[* 지구전을 펼치던 존스턴 장군이 여론에 떠밀려 물러나고 젊고 저돌적인 후드 장군이 임명되었는데, 정작 후드도 역공을 시도하다 실패한 후 애틀랜타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후퇴했고, 북군은 애틀란타에 무혈입성하게 된다. 후드는 이후로도 지나치게 공격적인 지휘로 북군의 승리에 혁혁히 기여한다.] 그래서 남부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는 이를 조정하고 남부 정부의 지침을 확정하느라 고생 좀 해야 했다. 허나 그렇다고 이 사람이 일을 잘했냐면 그것도 아니다. 전쟁 중에 일부 장군들만 편애하고 일부 장군들은 싫어하는 성향을 보이면서 전쟁을 말아먹었다. 남부는 영토도 인구도 북부에 밀리는 데다가 노예제도를 통한 목화농업 위주의 사회였던 탓에, 생산력도 빈약했고 군수물자 생산도 어려웠다[* 심지어 국가를 운영하는 데 가장 중요한 화폐조차도 남부는 북부에게 철저히 밀렸다. 1860년대 미국의 화폐는 "그린백(Greenback)"으로 불렸다. 그린백 도입 이전 화폐인 그레이백은 종이에 인쇄를 하는 방식이라 위조에 매우 취약했다. 이에 캐나다의 토마스 헌트 교수가 특수 녹색 잉크를 사용한 그린백을 개발하였고, 북부에서 이것을 도입한 것이다. 한편 조폐창을 비롯한 대부분의 재정 기관이 북부에 남아있었고 그린백 인쇄기술도 부족하였기 때문에, 남부는 구식 제조 방식으로 만든 그레이 백을 사용하였다. 심지어 지폐 종도 통일되지 않아서 전쟁 기간동안 총 72총의 지폐가 발행되었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덕에 남부 화폐의 가치는 땅을 치게 되었고 심지어 북부의 필라델피아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던 새뮤얼 업햄이라는 기업가가 신문지에 실린 그레이 백을 보고 기념품 용도로 그대로 복제하여 발행한 지폐보다 그 질이 조잡하여(...), 아예 밀수업자들이 남부연합에서 공식발행한 그레이 백이 아닌 업햄의 기념품 화폐를 가지고 사기를 치고 돌아다녔을 정도였다. 이때 업햄이 그레이 백 100달러를 5센트에 팔았다고 하며 남부연합의 화폐가치는 완전히 나락으로 가고 말았다.]. 농업 생산력에서는 당시 남부가 (풍부한 일조량과 높은 기온 등 대체로 농업에 유리한 기후조건을 기반으로) 민수와 군수를 불문하고 자체 수요를 충족하기에는 충분했으므로 크게 불리한 처지는 아니었으나, 이 생산력을 전쟁 수행 능력으로 전환하는데 필수적인 수송역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종종 '남부의 농업은 면화, 담배 등 상품작물 재배에 중점을 두었기에 막상 식량 생산에서 북부에 비해 열세였고, 이것이 남군의 부족한 식량보급의 원인이었다'고 평가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정확하다고 보기 어렵다. 인구에 비해 광대한 경작지에서 규모의 경제를 통한 농업 경영이 가능한 미국의 특성상 남북부 모두 당시 세계의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충실한 농업 생산력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남부의 식량작물 생산력은, 곡물을 대규모로 수출하여 막강한 외교적 카드로까지 활용하기까지 할 수 있던 북부에 비하면 열세였다고 말할 수는 있겠으나, 자기네 군민을 부양하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반론 남부의 식량 생산량은 딱 자급자족 수준이었기 때문에, 식량을 생산해야 할 청장년기 남자들이 군대로 가는 순간 생산량이 감소하였다. 이게 전쟁 중기부터 슬슬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전쟁 말기에 이르러 남부연맹이 영역의 대부분을 점령당함으로써 생산력을 상실하고 붕괴 직전에 처한 이후는 논외.) 이 점은 농촌보다 식량 보급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도시인데도 애틀랜타를 비롯한 남부의 주요 도시에서 북군 병사들의 불평 못지 않게 배부른 불평이 나왔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양고기나 쇠고기는 부자들이 아니면 입에 대기도 어려울 정도로 비싸졌고, 밀가루 가격 역시 봉쇄 이전에 비해 10배 이상 폭등했다.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옥수수 가루와 야채, 닭고기뿐이었다."고. '''진짜 문제는 후방에 아무리 식량이 충분히 있어도 이를 전선이나 도시로 운반할 여력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이었다.''']. 특히 북군이 점점 활발한 공세에 나서고 남군의 보급로를 적극적으로 타격하여 차단하면서 이 문제는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농업 기계화가 북부와 비교하면 거의 안되다시피 해서 남성들을 대량으로 징병하면서부터 식량 생산량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원래도 부족한 철도망은 상당수가 농지와 수출항을 연결하는 노선 위주로 건설되어 주간 보급에는 애로사항이 많았다. 궤간마저 표준화가 안되어서 [[표준궤]]와 [[광궤]]가 섞여 있어 그 종류가 4개에 달했으며, 그 부작용으로 철도 활용능력이 떨어졌다. 하필 궤간이 바뀌는 지역이 남군의 최전방으로 가는 경로의 중간이었는데,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려고 할 때마다 중간에서 궤간이 바뀌어서 환승하느라 시간을 다 까먹는 바람에 타이밍을 계속 놓쳤다고 한다. 또 북부는 철도의 효율성을 위해서 철도를 국유화했지만 남부는 전쟁 전처럼 민간에게 맡겼던지라 효율성이 떨어졌다. 전쟁 중에는 철도를 추가로 까는 것도 겨우 600km 정도에 그쳤다. 북군 병사들이 [[커피]]와 [[빵]], [[베이컨]]밖에 없는 단조로운 짬밥을 두고 배부른 불평을 하고 있을 때,[* 당시 유행한 것이 "오늘 아침은 커피 베이컨 빵, 점심은 베이컨 빵 커피, 저녁은 커피 빵 베이컨(...)과 같이 순서만 바꾸며 노래 부르는 거였다. 실제로 이 식단은 당시의 '''유럽 중산층'''의 식생활보다도 더 나은 수준이었다. 물론 고기라 해도 신선한 고기가 아닌 장기보존용 훈제나 염장 고기(베이컨 등)이고, 군대 식단의 특성상(...) 명목상의 식단보다 실제 나오는 요리의 질은 좋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남군 병사들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셔츠를 물어뜯고 있어야 했다. 보급이 이토록 절망적인 데다 설상가상으로 공업화가 덜 되었던 사정 탓에 남군은 식량이나 무기 뿐만 아니라 모든 물자가 부족했고 있는 것들마저 뒤죽박죽이었다. 남군 하면 흔히 떠올리는 회색 군복은 대부분 지급품이 아니라 병사 개개인이 스스로 마련한 것들이었고 아예 군복이 아닌 민간인 복장에 계급장만 부착하고 참전한 군인도 있을 정도였다. 군화도 지급받지 못한 채 자비로 마련하거나 맨발로 가야 할 지경이라, 북군의 보급부대를 습격했을 때 장병들 모두 군화가 있는지 찾아다녔을 정도였다. 군대도 이미 조직이 된 북부와 달리 새롭게 구성해야 했으며 기병의 경우 말 주인이 자기 소유의 말을 가지고 참전하는 등 민병대적인 성향도 강했다. 특히 남부 사회는 ‘민병대(Militia)’의 전통이 강한 탓에, 군은 스스로 자원해서 가는 곳이었지 억지로 끌려가는 곳이 아니다보니 초반에는 징병조차 힘들었다. 당시 싸우고 있던 지원병들도 1년 복무를 조건으로 군에 자원한 것이었다. 병력 부족을 느낀 남부 정부는 1년 병사들이 만약 복무를 연장하면 60일 휴가와 50달러의 급료를 주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부대를 선택할 수 있게 하고, 부대장을 직접 선출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자 병사들이 당연히 기병이나 포병 등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부대를 골라 가고, 엄격하고 유능한 지휘관보다는 친근하지만 무능한 지휘관을 선출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결국 3월 28일에 대통령 데이비스는 남부 의회에 징집령이 포함된 법안을 상정하였는데, 대다수의 의원들은 이 법안이 주(州)들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반대의사를 표할 정도로 중앙정부가 주정부를 통제할 힘조차 없었음을 반증한 것이다. 물론 상황이 절박해서 의원들도 할 수 없이 대통령의 법안에 동의하여 1862년 4월 16일, 징집법안이 남부 의회를 통과하였다. 이 징집령으로 1861년에 32만 5,000명이었던 남부의 총병력은 45만으로 늘어났다. 물론 대리인을 세울 수도 있고, 일부 직업인들은 징집에서 제외시키는 예외 사항을 두는 바람에 돈 많은 부자들이 징집을 피하고[* 돈 많은 부자들은 징집을 피하는 예외는 북부도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더 심각해서 [[뉴욕 징병거부 폭동|뉴욕에서는 폭동까지 터졌다.]]] 특정 직업인을 양성하기 위한 ‘학원’이 생기는 등 부작용이 있었지만, 이 징집령은 남부의 절박한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침략자 북군을 물리쳐서 자기 주와 노예제를 지켜야 한다"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는 높은 편이었다. 거기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유럽에 비해 낙후된 국가여서 측량에 의한 정확한 지도가 부족했으므로, 남부 측이 고향을 방어하는 처지에서 지형지물을 이해하는 수준도 높았다는 것도 강점이었다. 남부에 나름 전통있는 군사학교 등이 위치한 버지니아가 가담하였고 따라서 각 사관학교 출신들이[* [[로버트 E. 리]], [[토마스 잭슨]], [[제임스 롱스트리트]] 등의 장군들은 모두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출신이다.] 고향을 지킨다는 이유로 돌아갔을 때 남부가 더 장교단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건 사실이 아니다. 북측이나 남측이나 모두 장교진들은 대부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더 많은 웨스트포인트 출신 장교들이 북부(연방)측에 가담하였고, 장교의 질이나 장교의 숫자나 북부가 훨씬 우세했다'''. 예로 최고참 장성급들 중에서 7명 중 5명이 북부편이었고, 2명만 남부편이었다. 다만 이들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 1780년대생, 즉 18세기 사람도 섞여 있었다.] 실질적으로 복무한 사람들은 1~2명밖에 안 되고 그나마도 죄다 남북전쟁 도중에 죽거나 은퇴한다. 참모진들은 10명에 8명이 북부편이었고, 그 중에서 2명만 남부편이었다. 남부연맹 측의 이 2명 가운데 하나가 바로 미국-멕시코 전쟁 때부터 활약한 로버트 E. 리[* 당시 계급은 대령.]였고 다른 하나가 패장이라는 이유로 남부 팬덤에게 평가절하당하는 조셉 E. 존스턴[* 장성들 가운데 극히 드문 1800년대생이었으며 동시에 최초의 웨스트포인트 출신 장성이었다. 고위급인 장성들 중에서 유일하게 현장지휘가 가능한 나이였고, 실제로 남부로 붙자마자 남부측 장교단 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인 장성으로 곧바로 진급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현역이었다.]이었다. 그렇다면 총 장교들 숫자를 살펴보자. 웨스트포인트, [[버지니아 군사대학]] 등을 포함한 군사학교 졸업생들 중에서 남부측에는 약 280명, 그중에서 웨스트포인트 출신은 184명이 가담했고, '''북부측에는 809명''', 웨스트포인트 출신은 640명이 가담했다. 즉 고위 영관급 사관급 장교진만 보더라도 북부측이 훨씬 많았다. 대신 위관급이나 부사관급 등 하급장교들은 버지니아 군사대학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이들의 대다수가 남부 측에 붙었다. 그러나 북측에서도 [[버몬트]]에 위치한 [[노리치 대학교]][* 미국에서 제일 오래된 군사대학으로 미국 [[ROTC]] 제도의 산실.]가 있얼으며 600명 이상의 하급장교들을 배출했다. 그리고 북부의 장교단에는 교육자나 정치가, 사업가 등이 비교적 많았다. 중간에 연방군 총사령관이 되는 매클레런은 철도 기술자 경력이 있고 제20 메인연대를 이끌었던 조슈아 체임벌린은 [[보든 칼리지]]의 대학교수였다. 이렇게 개전시점에서 종전까지 장교단조차 질적으로든 숫적으로든 북부가 남부보다 밀리는 수준은 아니었다. 국가 체급이나 국력의 단순비교로는 남부가 크게 열세에 있었지만, 개전 초기 전략적 상황에서는 오히려 남부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북부의 목표는 남부연합에 가담한 13개 주 반란의 완전 진압인 반면 남부의 목표는 연방에서 독립하여 아메리카 연합국의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북부 입장에서는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는 물론, 반란을 지속하는 다른 주들까지 하나 하나 다 진압하고 평정해야 할 막중한 부담이 있었지만, 남부의 경우 북부 여론과 엘리트들이 지쳐서 남부의 분리를 받아들일 때까지 버티면서 북부를 물먹이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대전략이나 전략목표 설정은 부실했는데, 전반적으로 "고향에 쳐들어 온 양키"를[* 본디 이 '양키'란 말은 남부 사람들이 북부인들을 경멸하여 부르던 멸칭이었다.] 각 주, 각 지방에서 격퇴하고 고향을 지키는 형태의 자치방위 작전이 주로 이루어졌다. 북부의 영토를 공격하는 북진의 경우 각 주의 자주권을 내세우며 독립한 남부의 정치적 성향상 북부의 다른 주를 침략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도 있었고 다른 주의 주권을 침탈하는 점에서 남부연맹 성립의 명분과도 어긋났다. 게다가 남부의 주들은 전쟁 이전에 북부의 주들과 교류가 있었다. 심지어 전쟁 도중에도 남부와 북부 사이의 교류는 계속되었다. 이로 인해 초반에 남군의 선전으로 남군이 주도권을 가져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상대적으로 주도권을 이미 북부에 넘겨준 형태였으며 리가 감행한 북진을 위한 두 차례의 전략 기동이 [[앤티텀 전투]]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각각 막힌 뒤로 전략적 우세를 점하지 못하였다. 상대적으로 형태를 갖춘 남부의 대전략이라면 역시 북진하여 북부 본토에서 연방군 주력을 격파, 북군의 전쟁 수행 의지를 끊겠다는 리 장군의 전략인데, 결과론적이지만 남군의 보급사정이나 남부 사정을 무시한채 진행한 지나치게 무리한 계획이었다는 비판 또한 존재한다. 리는 자신의 홈그라운드인 포토맥 남쪽에서 싸울 때는 북군에게 훨씬 나쁜 교환비를 강요했지만, 북진했을 때는 그 입장이 반대가 되어 훨씬 수월한 정보와 지리를 잘 알고 있는건 북군이었고 보급면에서도 우월한 북군에 고전을 면치 못해 안 그래도 보충이 쉽지 않은 피같은 병력을 소모했다. 리가 완승을 거둔 경우에조차 북군 주력 포토맥군의 괴멸이라는 목표는 항상 이루어지지 않았고, 포토맥군은 패배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증강되어 돌아왔다. 또한, 리와 북버지니아군의 북진은 국가적 차원의 대전략이 되지 못해 다른 남군 장군이나 군단급 이상 제대의 도움을 받지 못했는데, 이는 서부전선에서 남군이 연전연패, 각개격파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남북전쟁은 북군은 200만 넘게, 남군은 100만 가까이 동원된 [[총력전]]이었으니 끝없는 [[소모전]]이 벌어지면 결국 말라죽는 것은 남부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남북전쟁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터진 내전으로 국민들의 전쟁 지지 여론을 필요로 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라는 반론도 강하다. 전쟁 기간에도 2년을 주기로 한 양원 선거, 4년을 주기로 한 대통령 선거는 계속 이루어졌으며, 선거에서 전쟁 반대파가 승리한다면 북부는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다. 애틀랜타가 함락되어 서부전선에서 남군이 심각한 타격을 입은 1864년 대통령 선거 직전 상황에서조차 매클레런은 공화당과 전쟁민주당이 연합한 링컨을 상대로 45%나 되는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바로 리 본인이 북버지니아군이 한참 약해지고 [[피터스버그 포위전|피터스버그에 틀어박힌]] 상태에서도 소모전으로 절반에 가까운 북부인들을 전쟁 반대파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방어전으로 우세한 교전비를 계속 유지하여 북부의 반전여론을 자극하고 유리한 평화조약을 맺고 종전하는 것은 전혀 비현실적인 목표가 아니었고, 돌이켜 보았을 때 오히려 남부의 최종 목표인 종전과 독립에 가장 가까운 전략이었다. 이렇게 국력이 약한 국가가 소모전을 유도하여 독립을 쟁취한 아주 가까운 사례가 있었는데, 바로 리의 먼 친척인 [[조지 워싱턴]]이 지휘한 [[미국 독립 전쟁]]이었다. 워싱턴은 아메리카의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파비우스]]로 불릴 정도로 [[파비우스 전략]]을 활용하여 훨씬 강한 영국군을 상대로 미국의 독립을 이끈 바 있다. 또한, 전쟁 당시 남군에서도 [[제임스 롱스트리트]]나 조셉 E. 존스턴처럼 공격적인 북진에 반대하고 대신 서부전선을 지원하며 병력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한 장군들이 있었다. 결국 서부전선에서 북군이 계속 성과를 내며 남부연합을 무너뜨린 것을 생각하면 이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다. 남부연합의 국력과 병력이 북부에 미치지 못했고 남군 내부적으로도 의견이 통일되지 못한 점은 분명히 있지만, 리의 공세적인 북진 전략 자체도 학계와 일반인 양쪽에서 비판받는 일이 많다. 또한 남부의 외교술은 전쟁 초반에는 나쁘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북부에게 뒤쳐지게 된다. 남부의 외교 전략은 바로 미국이 영국과의 독립 전쟁에서 프랑스를 끌어들여 영국을 치게 만들어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강대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이는 꽤 그럴듯한 전략이었는데, 유럽의 강대국들은 아직은 국력은 낮지만 북부를 중심으로 공업화를 진행하면서 발전속도가 빨라지는 미국을 보며 미래의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고, 이에 미국을 둘로 갈라 놓는 것이 이득일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게다가 남부 측은 전쟁 전까지는 세계 최대의 면화 공급원으로 시장을 독점하는 중었이기에 산업혁명으로 원자재 수요가 막대했던 유럽에 실제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실제로 전쟁 초반에는 유럽 각 나라들은 남부를 응원할지 북부를 지지할지 간을 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남부는 이 점을 이용해 유럽 열강들, 특히 당시 세계 최대의 면 수요국인 영국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여 국제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아 북부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을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영국이 이 제안에 귀를 기울이며 먹혀드는 것 같았으나, 북부가 제해권을 잡고 [[아나콘다 작전]]을 통해 해상을 봉쇄해버리자 면화를 팔고 싶어도 팔 수가 없게 되어버리며 실패한다. 게다가 남부가 봉쇄되는 동안 이 틈을 타 면화 산업에 뛰어든 이집트가 남부의 면화 공급이 끊긴 틈을 타 어부지리로 대박을 치며 유럽의 면화 수요 물량을 공급해주자 유럽 열강들은 남부를 지지할 이유가 줄어 버렸다. 또한 이 시점에서는 대다수의 유럽 국가들은 노예제를 폐지한지 오래고, 이미 유럽의 지식인들에게는 노예 제도가 야만적인 풍습이라는 인식이 있었기에 유럽에게 면화라는 실용적인 이익을 주지 못하게 된 남부의 지지 요청에 대한 대답은 날이 가면 갈수록 차가워졌고, 결국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강대국들은 전세가 천천히 기울기 시작하자 남부를 아예 못본 것 마냥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 외 유럽 열강들, 특히 엘리트 귀족사회였던 [[프로이센]]조차도 북부를 지지했다.[* 당시 독일계 국가들은 노예노동에서 손절하고 [[산업혁명]]으로 국력을 키워가던 시기였다.] 남부의 외교 실패의 또 다른 원인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북부에서 [[밀]]과 [[옥수수]]를 수입하고 있었던 점'''도 있다. 옷감이야 아쉬운 대로 아껴쓰면 되지만 곡물이 없으면 '''굶어죽을 수도 있다.''' 영국이 수입산 곡물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곡물법]]을 폐지한게 약 20년 전이라 식량의 상당수(약 20~30%)를 미국, 그것도 북부에 의존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남북전쟁 시기의 유럽은 흉년기였다. 이를 두고 농반진반으로 남부의 킹 코튼(King cotton, 목화왕)을 북부의 킹 콘(King corn, 옥수수왕)이 이겼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의외로 남부 출신이지만 북군 편을 든 연방주의자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앤드루 존슨]] 미국 대통령이나 남군 출신이었다가 탈영해서 [[미시시피주|미시시피 주]]에서 존스 자유주를 만든 뉴턴 나이트의 사례가 있다.[* 이는 2016년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92718|프리스테이트 오브 존스]]로 묘사된다.] 이 외에도 남부맹방의 모든 주(사우스 캐롤라이나 제외)에서 연방을 신봉하는 많은 백인 주민들은 북군에 입대해서 전쟁에 참전했는데 그 규모가 10만명에 달했다.[* 테네시 주: 31,000명, 버지니아 주: 21,000~23,000명, 노스 캐롤라이나 주: 10,000명, 아칸소 주: 9,000명, 그 외의 주들은 각 5,000명 이하.] 위에서도 소개되었지만 버지니아 서부 지방은 아예 웨스트 버지니아로 주를 따로 만들어서 연방에 가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