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전쟁 (문단 편집) === 서부전역 - 북부의 반격 === 상당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관심도 많았던 동부전역에 비해 남북전쟁의 서부전역은 당시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아나콘다 계획에 따른 서부 대전략이 충실하게 이루어지면서 남부연맹의 서부는 북부의 손에 넘어간다. 서부전역 전체를 통틀어서 남군은 의미있을 만한 승리는 단 한 번([[치카모가 전투]], 1863년 9월 조지아 주)밖에 거두지 못했고, 전쟁의 승패는 서부에서 결정되었다는 견해도 많다. 개전 초기 남군은 북군보다 전략적 우위에서 전선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남군은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장군이 아칸소부터 컴벌랜드 협곡까지의 남군을 모두 지휘하는 통일된 지휘체계를 갖춘 반면, 북군의 지휘체계는 데이비드 헌터 소장 휘하 캔자스군, 헨리 할렉 소장 휘하 미주리군, 돈 카를로스 뷰엘 소장 휘하 오하이오군으로 삼분되어 있었다. 그 결과 1862년 1월까지도 북군은 서부전선에서 통일된 전략적 목표에 대해서 합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남군은 통일된 지휘체계 하에 멤피스 및 오하이오 철도를 통해 군대와 물자를 수송하면서 상호지원체제를 굳혀가고 있었다. 북군은 총사령관이었던 윈필드 스콧이 계획한 '미시시피 강을 봉쇄하여 남부의 무역을 완전히 봉쇄'하는 아나콘다 작전 시행을 위해서 일리노이 주와 인디애나, 오하이오 주 방면에서 아칸소 주와 테네시 주 방면으로 공세를 가하여 루이지애나 방면에서 북상한 강상 해군과 접촉, 남부를 미시시피 강을 기준으로 반토막 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일리노이와 인디애나, 오하이오 주에서 아칸소, 테네시 주 방면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남부와의 경계주였던 미주리 주와 켄터키 주를 지나가야 했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켄터키 주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앞서 노예주나 자유주냐 문제로 유혈충돌을 빚었던 미주리 주에서는 어느쪽에 붙느냐를 가지고 주민들 사이에서 심한 갈등이 벌어졌다. 미주리 주지사 클레이븐 잭슨은 연방탈퇴주의자로 남부연합에 합류하기를 원했지만 주의회의 경우 연방 잔류에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전쟁 발발과 동시에 주 자체적으로 주지사 파와 주의회 파간의 유혈충돌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상황이 악화되자 클레이븐 잭슨은 5만명의 민병대를 소집하겠다는 명령을 하달하며 미주리 주의 남부연합 움직임을 노골화했다. 그러자 북군도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세인트루이스에 주둔하던 너새니얼 라이언 준장이 530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미주리로 진입, 주지사파 민병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남부 역시 아칸소 주로의 진출로를 제공할 수 있는 미주리 주를 순순히 넘겨줄 생각이 없었고 아칸소 주의 남군을 투입한다. 이렇게 북상한 남군과 미주리의 친 남부 민병대가 합류한 1만 2천여명의 병력이 라이언이 이끄는 5300여명의 북군 및 프란츠 시겔이 이끄는 1200여명의 서부군 제 2여단을 상대로 1861년 8월 10일 윌슨스 크릭에서 격돌했다. 북군은 무려 2차례에 걸친 남군의 총공격을 격퇴하며 예상외로 선전했지만 3번째 남군의 돌격과정 중 너새니얼 라이언 준장이 전사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후퇴하였다. 이때 전사한 너새니얼 라이언 준장은 북군의 전쟁 발발 이후 첫 장성급 전사자였다. 하지만 남군도 피해가 적지 않았고 아칸소 주에서 온 남군이 그대로 아칸소 주로 복귀하면서 북군에게 미주리 주를 사실상 내주었으며, 이로써 전술적으로는 승리하였지만 전략적으로는 패배하게 된다. 한편 북군의 서부 방면군 사령관 존 C. 프리몬트 소장은 커다란 삽질을 저지르게 되는데 윌슨스 크릭 전투 당시 후방에서 너새니얼 라이언에게 지원을 해주지 않고 군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노예주였던 미주리 주에서 멋대로 노예해방선언과 함께 계엄령을 발표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노예주였던 미주리 주의 주민들은 격렬히 반대했고 링컨 역시 프리몬트에게 해당 명령을 취소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프리몬트는 링컨의 명령을 거부하였고 동시에 연방 내부의 노예 해방주의자들이 링컨에게 미주리 주의 노예해방명령을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링컨은 어쩔 수 없이 미주리 주에서의 점진적인 노예 해방을 승인하는 방향으로 타협을 하게 된다. 남군 역시 실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윌슨스 크릭 전투에서의 북군의 전략적 승리로 미주리 주가 북부의 손에 넘어가자 아칸소 주와 테네시 주는 본격적으로 미시시피 강과 테네시 강의 주요 요충지를 요새화하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남군의 레오니다스 포크 장군이 미주리 주에서 테네시 강과 미시시피 강으로 나뉘는 분기점을 차지하여 북군의 남하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켄터키]] 주의 콜럼버스 마을을 점령하면서 중립을 표방했던 켄터키 주가 연방에 가담해 버렸다.[* 당시 켄터키 주지사는 남부연합에 심정적으로나마 동조하던 사람으로, 전쟁이 발발하자 병사를 모집해달라는 링컨의 요청에 "단 한 사람도, 단돈 1달러도 자매인 남부의 주들을 제압하려는 사악한 목적을 위해 보낼 수 없다"며 거절했다. 물론 남부연합의 모병 요청도 거절하긴 했다. 반면 주의회는 주로 북부의 미 연방을 지지했고, 이러한 양자의 충돌 속에 양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안이 중립이었다. 그러던 와중 포크 장군 하의 남군이 모빌 및 오하이오 철도의 종점이자 미시시피 강을 통제할 수 있는 요충지인 콜럼버스를 점령하고, 이에 대응해 그랜트 지휘하의 북군이 파두카를 점령하자, 미 연방을 지지하던 주의회는 남군에 대해서만 철수하도록 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켜버렸다. 물론 분리주의자들은 여전히 켄터키 주 남부~서부에 많이 있었고, 이들을 기반으로 한 남부연합을 지지하는 [[https://en.wikipedia.org/wiki/Confederate_government_of_Kentucky|켄터키 주 정부]]가 [[https://en.wikipedia.org/wiki/Russellville,_Kentucky|러셀빌]]에서 설립되었으며, 남부연합은 1861년 12월에 이들을 남부연합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의하였다.] 이렇게 되자 남군은 당초 미주리 주에서 남하하는 북군을 저지만 하면 되었던 전략적 이점을 상실하고 켄터키 주의 북군까지 상대해야 하는 부담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1862년 초부터 남군의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기 시작했다. 할렉에 대한 끊임없는 요청 끝에 허가가 떨어지자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이끄는 북군은 1862년 2월 포트 헨리 요새, 포트 도넬슨 요새를 함락시키며 컴벌랜드 강과 테네시 강을 장악했고, 이에 포크는 열심히 요새화하던 콜럼버스를 포기하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랜트는 남군이 사용하던 철도를 끊어 상호간의 지원을 어렵게 해버렸다. 한편 이 와중에 동부전선에서 P.G.T. 뷰리가드 장군이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측으로 배속되었는데, 뷰리가드가 [[미시시피 강]]과 테네시 강 사이의 남군을 지휘하도록 임명되면서 통일된 지휘체계는 오히려 반으로 쪼개져 버렸다. 그리고 3월 11일 링컨의 명령으로 할렉이 미주리 강에서부터 테네시 주 녹스빌까지의 모든 북군을 통솔하게 되면서 오히려 북군은 그동안 나뉘어 있던 지휘체계가 통합되었다. 1862년 4월 6일, [[샤일로 전투]]에서 피츠버그 랜딩에 포진해 있던 그랜트의 군대를 뷰리가드와 존스턴이 이끄는 남군이 기습해 막대한 피해를 입히지만 북군은 끝내 버텨내었고, 이 과정에서 혼란스러운 남군을 통제하던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이 총탄에 맞아 과다출혈로 사망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남군은 이튿날 그랜트가 예비대를 포함한 증원군을 투입하면서 수가 거의 배로 불어난데다가 밤사이 재정비한 북군의 반격에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전사한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은 남군 내부에서 유능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남부 입장에서 굉장히 큰 인적 손실이었다.][* 사일로 전투에서 죽은 존스턴은 불 런 전투에서 활약한 남군 사령관 조셉 존스턴이 아니라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이다. 조셉 존스턴은 5월 북군의 매클레런을 맞아 요크타운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고 5월 31일 세븐 파인즈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로버트 리로 교체당한다. 존스턴은 전쟁 내내 죽지 않고 잘 살다가 적장이자 친구였던 셔먼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폭우를 그대로 맞으며 추모하다 이로 인해 폐렴에 걸렸고 장례식 10일 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달 말에는 북군 해군에 의해 남부 최대의 도시 [[뉴올리언스]]가 함락되고, 곧 빅스버그 주변을 제외한 미시시피 강 전체를 사실상 북군이 통제하게 된다. 이로써 남부는 사실상 두동강이 나고 만다. 1862년 8월에는 남군의 브랙스턴 브래그와 에드먼드 커비 스미스가 연합하여 북군 돈 카를로스 뷰얼의 군대를 우회하고 켄터키를 침공, 켄터키를 남부연합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남군은 켄터키의 대립 주지사를 세우고 뷰얼을 상대로 페리빌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브래그는 앤티텀과 코린트에서의 남군 패배 소식을 듣고 후퇴를 선택했다. 이후 켄터키는 전쟁 내내 연방 소속으로 남았다. 일시적으로 북군 세력이 중부 테네시와 앨라배마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전반적인 결과는 남군의 전략적 실패에 가까웠다. 한편, 이 전역에서 굼뜬 모습을 보인 뷰얼은 윌리엄 로즈크랜스로 교체되었다. 1862년 연말부터는 북군의 그랜트가 [[미시시피 강]] 유역의 마지막 남부 요새 빅스버그를 점령하기 위한 첫 작전에 나섰다가 실패했다. 한편, 컴벌랜드군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로즈크랜스 휘하의 북군은 비슷한 시기 스톤스 리버에서 서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끝에 브래그의 남군 테네시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브래그는 테네시 중남부의 요충지 털라호마를 중심으로 방어 태세를 갖추었지만, 로즈크랜스는 오랜 준비 끝에 훌륭한 기동으로 브래그를 따돌리고 1863년 7월 적은 피해로 털라호마를 점령했다. 하지만 이 전공은 빅스버그 함락, 게티즈버그 전투와 비슷한 시기였기 때문에 정부나 언론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브래그는 테네시 동남쪽 끝, 조지아 코앞의 채터누가까지 후퇴했다. 한편 6월 남군은 [[https://yoda.wiki/wiki/Morgan%27s_Raid|모건의 습격]]이라는 북진 교란작전을 시도해 [[인디애나]] 주 남부를 거쳐 [[오하이오]]주까지 북상했으나, 북군에 가로막혀 7월 26일 [[https://en.wikipedia.org/wiki/Salineville,_Ohio|샐린빌]]에서 모건이 포로로 잡히면서 끝났다.[* 모건은 포로로 잡혔다가 탈옥해서 켄터키를 거쳐 남군으로 복귀한 뒤 1864년 9월 전사했다.] 모건의 습격은 남부연합에 이렇다 할 이점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1863년 [[독립기념일|7월 4일]], 빅스버그조차 [[율리시스 S. 그랜트]]에게 함락된 [[빅스버그 포위전]]은 남북전쟁의 주요한 전환점 중 하나였다. 이 전투로 인해 미시시피 강 전체를 북군이 완전 통제, 간당간당하던 '''남부의 동/서가 단절'''되어 서쪽의 [[텍사스]]와 [[아칸소]] 주에서 남부의 다른 지역에 지원을 해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7월 5일 동부전역의 '''[[게티즈버그 전투]]'''에서도 북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은 이를 분기로 뒤집히기 시작한다. 빅스버그 함락, 게티즈버그 전투 패배 직후에는 오히려 서부전역의 남군이 일시적으로 강화되었는데, 빅스버그가 함락되면서 빅스버그로 보내졌던 남군 지원군이 귀환하고 게티즈버그 전투 패배 이후 [[제임스 롱스트리트]] 휘하 부대가 리 장군의 북버지니아군에서 서부전역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1863년 9월 [[치카모가 전투]]에서 증강된 남군은 행운의 도움과 롱스트리트의 활약으로 로즈크랜스의 북군을 상대로 승리하지만 '치카모가의 바위' 조지 토머스 장군의 끈질긴 방어로 전과를 확대하는 데는 실패한다. 11월, 남군은 로즈크랜스를 추격하여 채터누가에서 포위하지만 그랜트와 셔먼의 지원군이 도착, 포위가 풀리고 남군이 물러나며 지금까지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딥 사우스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때 18살 북군의 한 소위는 채터누가 전투에서 남군의 중앙을 돌파하는 작전에 큰 공을 세워 최연소 명예 대령으로 진급하였다. 이 18살 소위의 이름은 아서 맥아더 주니어였고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 필리핀 전쟁,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중장까지 오른 아서 멕아더 주니어는 1880년 아칸소 주의 리틀록 병영에서 셋째 아들을 얻었다. 그가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이다.] 1864년 봄, 북군 총사령관으로 그랜트가 임명되었고, 서부전역 사령관에는 그 후임으로 [[윌리엄 테쿰세 셔먼]]이 임명되었다. 그랜트와 셔먼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남부의 전쟁수행능력과 의지를 완전히 꺾어야만 한다고 판단했으며 이에 셔먼은 [[총력전]]의 개념을 시행에 옮겼다. 그랜트는 동부전역으로 이동, 조지 미드의 포토맥군을 직접 통제하며 끊임없이 리에게 싸움을 걸었고, 셔먼은 채터누가에서 조지아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남군의 조셉 E. 존스턴은 지연전을 펼치며 셔먼의 보급과 진격을 방해했지만 셔먼이 애틀랜타에 접근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고, 곧 젊고 공격적인 존 후드가 새로운 지휘관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후드의 공격은 압도적인 셔먼의 병력을 막지 못했고, 결국 후드가 [[애틀랜타]]를 포기하면서 1864년 5월부터 9월까지 벌어진 [[https://en.wikipedia.org/wiki/Atlanta_campaign|애틀랜타 전역]]은 셔먼의 승리로 끝난다. 이 때 셔먼은 도시 시민들을 소개시키고 도시의 관공서와 군사시설을 완전히 파괴한다. 한편 후드가 끊임없이 셔먼의 보급선을 위협하고 기회가 된다면 북쪽으로 진군할 것처럼 보이자 셔먼은 후드는 토머스에게 맡겨버리고, 오히려 동진하면서 보급선을 포기하고 물자를 현지조달하며 진군 경로의 전쟁수행능력, 의지를 꺾고자 하는데 이것이 유명한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March to the Sea, 1864년 11월 15일 ~ 12월 21일)이다. 이때 셔먼의 북군은 애틀랜타에서 출발해 대서양 연안의 서배너(Savannah)까지 진군하며 가는 길마다 생지옥을 만들었다. 후드는 셔먼을 추격하는 대신 테네시로 북진하여 전쟁의 일발 역전을 노리지만, 프랭클린-내슈빌 전역에서 토머스와 스코필드에게 [[내슈빌 전투]]에서 대패하고(1864년 12월) 안 그래도 부족한 남군 병력을 크게 깎아먹었다.[* 전역의 막바지를 장식한 프랭클린 전투에서, 후드는 내슈빌로 북군이 후퇴해 토머스와 합류하는 것을 막는답시고 방어진지에서 갖추고 기다리던 스코필드의 지휘 하의 북군에 정면돌격을 명했다가 북군이 약 2,00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동안 6 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남북 양측을 통틀어 최고의 사단장급 인재 중 하나로 평가받던 패트릭 클레번(다만 패트릭 클레번은 흑인을 해방시켜서 징병하자는, 당대 남부 정계에 있어 과격한 의견을 내놓았고 이걸 빌미로 상부에 찍혀서 군단장급으로 중용받지 못했다. 클레번의 군사적 재능은 로버트 리가 인정했을 정도였다)이 사망한 것은 물론, 클레번을 포함한 장성급 지휘관 14명, 여단장급 지휘관 무려 55명이 다치거나,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전역의 마지막인 [[내슈빌 전투]]에서는 섣부르게 공격을 하지는 않고 수비를 굳혔지만, 약 2대 1의 수적 우위를 가지고 있던 토머스와 스코필드 휘하 북군에게 대패하였다. 그 결과 전역의 시작 때 4만을 넘던 남부의 테네시군은 전역이 끝난 1865년 1월 후드의 상관인 뷰리가드가 남부연합의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에 편지를 보내 15,000명도 되지 않는다고 경고할 정도에 이르렀다. 후드는 얼마 후 테네시군의 지휘권을 내려놓은 이후 다시는 야전지휘권을 받지 못한다.] 몇몇 남부측 역사학자들은 셔먼의 바다로의 진군은 셔먼이 애틀랜타를 점령한 시점에서 서부전역의 남군은 박살났으며,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의 패배는 이에 쐐기를 박았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바로 그 바다로의 진군의 프리퀄격인 전장이 애틀랜타였고, 셔먼이 "바다로의 진군"으로 남부의 후방을 들쑤셔놔서 급해진 후드가 프랭클린-내슈빌에서 불리한 병력을 가지고 싸움을 걸어 남부측 서부전선이 완전히 붕괴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걸 상기하면 의미가 없다고 하기 매우 힘들다.[* 후드가 셔먼을 쫓는 대신 셔먼의 보급선을 노리고 북쪽으로 진군한 것이 셔먼의 진군을 도와준 꼴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남군이 북군의 보급을 방해하려고 우월한 기병대를 동원해서 북군의 물자를 끊임없이 약탈하고 파괴했는데, 이 피해가 어마어마했다. 결국, 셔먼 입장에서는 애틀랜타를 점령한 이후에 보급로를 사수하기 위하여 후방으로 되돌아가 철도 및 보급로를 보호하면서 후드와 지루한 숨바꼭질을 하던가, 아니면 그대로 앞으로 진격하면서 중간중간 현지에서 보급을 조달하면서 남군의 방해 없이 보급을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항구로 갈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는데 당연히 셔먼은 "바다로의 진군"이라는 논리적인 선택을 했다. 남군은 남부의 교통의 허브이자 주요 보급도시였던 [[애틀랜타]]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게 전쟁을 결정지은 결정적인 패배였다는 시각이 있다. 이 패배가 없었으면 후방이 털리지 않은 남군은 어느정도 전역유지가 가능해서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링컨이 1864년 11월 대선에서 패배했을 가능성이 있다. 허나 실제로는 셔먼의 북군에게 1864년 7월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tlanta|애틀랜타 전투]]에서 크게 패함으로써 1864년 9월 애틀랜타를 상실하여 전쟁지속능력을 잃어버렸으며, 남은 전력도 11~12월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 후드의 남군이 토마스와 스코필드 휘하의 북군에게 완패했다. 애틀랜타 전투가 전세를 기울어지게 한 전투였다면, 프랭클린-내슈빌 전투는 남군이 전쟁을 이길 수 있는 눈꼽만한 가능성마저 완전히 날려버린 전투라고 볼 수 있다. 이 당시 셔먼이 바다로의 진군으로 남군의 후방을 휘젓고 있긴 했으나 북군이 프랭클린-내슈빌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남군 역시 무주공산이 된 북군의 후방을 휘저을 수 있게 되므로 전쟁이 장기화되어 남부 정부가 원하는 대로 북부 정부를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가능성도 있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애틀랜타 전역에서 큰 패배를 당하여 전력이 많이 줄어든 시점에서 남군의 패배는 필연적이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다. 이 때의 패배로 후드는 woodenhead란 별명을 얻었다. 본래 뜻은 공세를 펼치는 모습이 마치 통나무로 밀어붙이는듯 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으나, 이 패배 이후엔 머리가 나무로 가득 찬, 즉 돌대가리와 같다는 모욕어린 뜻으로 바뀌었다.[* 직역하면 나무로 된 머리. 적당히 현지화하면 '''돌대가리''' 정도로 번역 가능하다. 단, 이 별명 자체가 후세의 창작이라는 설도 있다.] 결국 남군은 이런 서부전역에서 열세로 말미암아 서부의 물자와 인력이 동부를 지원하기는커녕 동부의 주전력으로 서부를 지원해야 할 상황에 몰렸다. 후드가 서부전선의 지휘권을 잃고 나서 결국 조셉 E. 존스턴이 다시 서부전선에 복귀하여 지휘권을 가지게 되나, 이미 존스턴 휘하의 군대는 없는 병력을 박박 긁어모아도 20,000명을 조금 넘는 수준밖에 되지 못했고, 심각한 수적 열세 하에서 노스 캐롤라이나로 진군하던 셔먼을 막아야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