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전쟁 (문단 편집) === 미합중국 === >'그리고 비록 그대가 가난할 지라도' >'그대는 절대 노예가 되지 않으리!' >당시 연방 지지자였던 조지 프레더릭 루트가 작사, 작곡한 연방군의 군가, '자유의 함성 ([[Battle Cry of Freedom]])'[* 원문: And although he may be poor, he shall never be a slave. 이 노래는 남부연합군 병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물론 가사는 그들 입장에 맞게 개사했다.] 북부는 전쟁 초반에 준비가 안되었기 때문에 그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야전에 투입할 수 없었고 초반에 남부연합에 계속 패배하여 포토맥 강 근처까지 밀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기본적인 국력의 우위로 인해 몇 번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병력을 충원할 수 있었고 장비나 보급에 있어서도 항상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북군은 전쟁 내내 남군보다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무기로 싸울 수 있었으며 언제나 전력상 우위를 놓치지 않았다. 여기에 연방은 정치적 혼란과 인기없는 전쟁이라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전쟁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여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연방 대통합을 위해서 남부의 항복이라는 목표를 우선 확인하게 했고 그를 위해서 장기적으로는 아나콘다 계획으로 서부와 동부를 분리한 후 수출입을 막아 고사시켰으며, 단기적으로는 동부의 포토맥군이 리치먼드 함락 혹은 동부전역 남군의 주력인 [[로버트 E. 리|리]]의 북버지니아군 섬멸을 목표로 끊임없이 공세를 지속했다. 그 결과 남부연합을 고사시키면서 전쟁 수행 능력을 무너뜨릴 수 있었으며 결국 셔먼에 의해 서부가 완전히 박살나는 동안 동부에서 그랜트의 소모전에 말린 남군은 남부 한가운데서 결전을 강요받고 패배했다. 하지만 연방은 비단 초반 뿐 아니라 그랜트 취임 이전까지 지휘관들의 역량이 남부연합에 처지는 것에 더해서 소극적인 지휘 때문에 우세한 전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전술적 문제를 갖고 있었다. 제1차 불런 전투도 북군이 초기 과감한 기동에 실패하여 남군의 응원군 도착을 허용한 것이 전세를 뒤집었고 능력이 있고 병사들에게도 인기가 있던[* 본인 기록이나 후대의 평가를 보면 병사들이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것에 심리적인 부담감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함부로 돌격 앞으로! 를 하지 않아서 사병들은 장군을 좋아했지만 빨리 성과를 내야 하는 정치인들은 싫어했다고 한다.] 매클레런은 소극적인 지휘로 하마터면 [[로버트 E. 리|리]]가 연방 수도로 진격하는 것을 허용할 뻔 했다. 심지어 게티즈버그 전투 당시 지휘관인 미드마저도 전투가 끝난 후 [[에이브러햄 링컨|링컨]]의 추격 명령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으로 나서서 [[로버트 E. 리|리]]의 남군을 끝장내는 데 실패했다. 이런 소극적이고 고전적인 지휘로 북군은 상당히 오랫동안 남군에게 계속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은 그랜트의 부임으로 비로소 반전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