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남북전쟁 (문단 편집) === 미연합국 === 남부연합은 북부 이상으로 전쟁 준비가 안된데다가 기본적인 국력이 북부에 한참 미달하였지만 북부도 당장은 상황이 비슷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그렇게까지 불리하지 않았다. 남부는 각 주를 지키기 위해서 모인 자발적인 병력이 근간이어서 '침략군'인 북부를 몰아내자는 병사 개개인의 목표 의식이 강했고 전투의지도 높았다. 북군에 비해 모든 게 부족한 상황에서 끝까지 전투를 치른 남군의 감투정신은 이런 기반에서 나왔으며 그 결과 신발도 없어서 맨발로 행군하면서도 전술 단위의 전투력에서는 항상 뛰어난 전과를 보여주었다. 북부 측에 더 많은 웨스트포인트 졸업생들이 가담하였고, 상급 장교들의 수도 북군 측이 더 많았다. 가령 최고위 장교들은 알버트 시드니 존스턴 명예 준장, 조셉 E. 존스턴 준장, [[로버트 E. 리]] 대령 정도만 빼면 죄다 연방 측에 붙었음에도 전쟁 시작 당시의 최고위 장교들 중 실제로 전선지휘를 맡아 두각을 드러낸 것은 남군측에 가담한 소수의 그나마 젊은 장교들이었고, 연방측에 잔류한 대부분의 고위 장교들은 절대다수가 60대로 은퇴할 나이에 접어들어 아나콘다 계획을 입안한 윈필드 스콧 정도를 제외하면 전쟁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남군의 명장들이 뛰어난 병력과 합쳐진 덕분에 초반에는 강력한 북군을 말 그대로 관광태우고 다녔다. 그래서 전쟁 초기 북군의 연이은 패배는 연방에 충격을 주곤 했다. 압도적인 국력으로 남부를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그 뛰어난 장교단도, 전쟁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실력의 간극이 좁혀진다. 율리시스 그랜트나 윌리엄 셔먼, 조지 토머스 등 북군에서 유능한 장군들이 계속 등장한 반면, 남군의 장교단은 스톤월 잭슨이 죽는 등 지속적으로 소모되고 있었다. 북군의 고급 장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장교들도 경험이 쌓이면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오르게 된다. 거기다 점점 전쟁이 불리해지니 남부측은 정치적인 이유 등 여러가지 빌미로 유능한 장교들을 해임시키고, 위관급 장교 출신에게 별을 달아주는 등 아주 개판이었다. 초기의 사기높던 의용병들도 점점 숫자가 줄어들자 1862년 [[징병제]]를 통과시켜 18~35세까지의 백인 남성들을 징병했다. 그리고 62년 말에는 징집 연령을 확대시켜, 17~50세까지 징병 대상에 포함시켰다. 다만 18세 미만과 45세 이상은 자기 주에서만 복무하도록 하였다. 그 외에 노예 20인 이상 농장의 관리자나 기술자 등 중요하다고 여겨진 직종을 가진 사람들은 면제되었다. 외교전에서도 남부연합은 패배했다. 남부는 연방에서 벗어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해서 유럽,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승인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전술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외교적으로 승인을 얻는 전략은 독립전쟁 당시와 비슷한 방법이었는데, 영국과 미국 사이 있었던 몇번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영국이 이집트에서 대체 목화 수입로를 확보하면서 남부연합산 목화의 경제적 가치가 줄었고, 앤티텀 전투 후에 노예 해방 선언으로 유럽 국가들의 개입 명분까지 상실하면서 실패했다. 오히려 연방정부의 해양 봉쇄로 목화 수출이 중단되어 경제적 어려움만 커졌다. 전술적 승리를 외교적으로나 국가 전략으로나 써먹지 못하게 되자 남부연합 대통령인 제퍼슨 데이비스는 북부보다 훨씬 모자라는 전력을 가진 남부연합이 방어전을 펼쳐야 이길 수 있다고 보았고 북진 공세에 소극적이었다. 애초에 남부가 전쟁에서 우월한 교환비로 계속 이길 수 있던 이유는 대부분 전장이 남부연합이었고, 남부연합은 공세가 아니라 주로 방어하는 측이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전술적으로 아무리 승리해도 전략적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니 북부는 계속 병력을 모아서 밀어붙이고 남부는 이걸 겨우 저지하는 형태가 되면서 전쟁의 주도권은 북부 쪽으로 넘어갔다. 그나마 로버트 E. 리가 이끌던 동부전선은 전선유지라도 했지, 서부전선은 빅스버그 전투 이후로 상태가 개판이었다. 아무리 장교단이 좋아도 병력이 부족하고 물자가 부족한데, 대통령이라는 작자는 정치질하기 바쁘고 주 정부들은 서로 따로 노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방어전 위주의 전략이 아주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 준비없는 방어전략은 결국은 소모전만 강요하게 될 뿐이었다. 반전여론을 지피기 위해서라도 연방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동부에 있는 북군 주력인 포토맥군을 전멸시키는 수준의 승리가 필요했다. 애틀랜타를 점령하기 이전에는 차기 선거에서 링컨의 실각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었지만, 동부전선이 고착된 상황에서 덜컥 셔먼이 남부연합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애틀랜타를 점령하하며 군대의 사기가 확 오르고, 북부의 전쟁 의지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 게다가 상황이 그 지경인데도 흑인 노예들을 끝까지 멸시하여 군사력으로 활용하지도 않다보니 군사력의 열세는 면할 수가 없었다. 북부 2200만의 절반도 되지 않는 남부의 인구 900만명 중 1/3 이상이 흑인이었으며, 몇몇 주들은 흑인 노예 인구가 주 인구의 절반가량이었다. 흑인 노예들을 군재로 동원하려면 해방을 시켜주어야 하고, 그러면 남부연합의 건국과 독립 시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여러모로 태생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남부의 명분은 이렇게 취약했다. 1865년 3월에 와서야 흑인을 입영시키는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실질적으로 뭔가 하기에는 이미 늦은 후였다. 다만 북부와 같이 흑인들의 대규모 입대는 없었어도 남군에 흑인 병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남북전쟁 시기의 사진을 살펴보면 남군 출신의 흑인 병사가 찍힌 사진들도 꽤 나온다. 다만 오해를 하면 안 되는게, 전쟁 최후반까지 흑인 노예들의 입대는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흑인 병사''들은 대부분 집안에서 데려온 노예였다. 남군의 1/3이 노예를 소유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리 전술적으로 승리해도 상대방은 좀 쉬면 금방 다시 공세에 나서고 이를 지난번 전투에서 입은 피해가 복구되지 않은 병력을 동원하여 다시 막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처럼 전술적으로 아우스터리츠에 비견될 정도가 아닌 이상 소모전에서 남부연합이 우세를 점할 가능성은 없었다. [[군수품]]과 물자가 딸리자 남군은 최후의 발악으로 닥치는대로 민간에서 물자를 징발해갔는데 이는 남부연합 농장주들의 많은 반발을 사 남부연합 정권에 대한 지지를 더 떨어트리게 되는 원인이 됐다. 막강한 전력의 북군이 남부연합에 쏟아지지 않고 남부 영토가 전장에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으로 북부로 진격해서 북군을 붙들어매고 북부 영토를 휘젓고 다닐 필요가 있었다. 만약 리가 제대로 북진했으면 북부의 수도권이 전부 남부연합의 영향권에 들어가기 때문에 링컨은 어쩔 수 없이 종전 협상에 나서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다음 선거에서 패배하여 실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그냥 전선유지만 해도 어차피 미국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 국가였으니 돈 많이 들어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전쟁에 지친 국민들이 링컨을 재선시켜주지 않으면 남부연합이 이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의 그렇게 될 뻔 했다. 그러기에 북부가 고착된 동부전선은 유지하면서, 빅스버그 전투로 확보한 미시시피 강을 통해 진격이 훨씬 더 쉬워진 서부전선을 통해 승부를 보려고 했는데, 애틀랜타를 점령한 이후에는 오히려 남부연합의 후방을 휘저으면서 남부의 전쟁의지를 완벽하게 꺾어버렸다. 반면 남군의 북부 진격은 전력상 한계와 전술적 실책으로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게다가 명분인 각 주의 주권 운운도 '''모두에게 먹힌 것도 아니었다.''' 남부연합에 가담한 주는 총 11개인데 중요한 점은 '''노예제를 시행하고 있는 주는 그보다 더 많았다.''' 앞서 보았듯 이른바 '경계 주'라고 불리던 지역들은 '''노예제는 옹호하나 각자의 사정으로 가담하지 않은 주'''들로 한 마디로 노예제 사수를 외치는 주들간에도 손발이 맞지 않는 경우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대다수는 분리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연방에서 사전에 제압해버렸지만 켄터키처럼 침략당해서 그 반동으로 연방에 남은 경우도 있었다. 어쩌면 남부연합이 북진공세에 소극적이었던 것에 영향을 줬었다.] 게다가 이 남부연합의 주들 중 대표적인 주 중 하나인 버지니아 주의 경우에는 아예 '''둘로 쪼개졌다.''' 버지니아가 웨스트버지니아와 버지니아로 쪼개져 웨스트버지니아는 미 연방, 버지니아는 남부연합에 가담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남부연합이 북진하기 어려운 조건인데 이렇게 북부에 있는 노예제 옹호 주들이 외면하니 따블로 손해일 수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