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전쟁 (문단 편집) === 외교적 의의 === 대외적으로 아시아에서 미국의 개입 능력이 약해지는 원인이 되어 [[조선]]에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년) 이후 5년이나 지나서야 [[신미양요]]가 일어나게 되었고, [[일본]]에는 [[쿠로후네 사건]] 이후 [[미국]]의 영향이 적어져 [[메이지 유신]]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이 공백기간 [[대정봉환]]과 [[무진전쟁]]이 일어났다. 마찬가지로 조선도 러일전쟁시기에 일본의 영향이 적어진틈을 타서 광무개혁의 성과를 어느정도 이룩하기도 하였다. ]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는 남북전쟁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본문에 서술된 부분까지 파악하게 되면 "참 뜬금없는 전개다"라는 생각을 갖게 될 수 있다. 미국의 건국에서부터 서부개척, 남북전쟁, 미국의 제국주의화까지 전부 연관되어 지속된 역사인데 그 일부분만 떼어놓고 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몰라도 근현대사 시험치는 데는 지장없었다.[* 애시당초 미국의 서부개척사는 대한민국 학생들 입장에서 봤을 때 '미국이 서부로 진출했다'정도만 알아도 아무 문제 없다.] 특히 한국의 경우, [[신미양요]]의 광성보 전투에서 [[미군]]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수할 수 밖에 없었던 주된 이유로, 남북전쟁을 겪은 미국이 원정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점이 꼽히고 있다. 당시 조선의 강화도 수비군은 궤멸당했으며,[* 강화도에서 조선군은 상대에게 극소수의 피해를 입혔을 뿐, 지휘관이 전사하고 군기까지 빼앗기며 패했다. 이때 전리품이 된 어재연 수자기는 136년 만에 겨우 돌아왔다.] 그 상태로 한성이 함락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남북전쟁의 결과는 중남미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쪽도 노예운용을 중심으로 플렌테이션 농장과 광산을 운영했던 곳이며, 무엇보다도 카스타 제도가 이어져서 노예를 부리는 것이 일종의 정체성이자 사회, 문화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전쟁동안 남부의 외교적 고립은 중남미 국가 전체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었고, 1888년 브라질을 마지막으로 노예제를 서서히 철폐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