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전쟁 (문단 편집) == 만약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했다면? == 이것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떡밥이다. 실제로 [[에이브러햄 링컨]]이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하기 전까진 남부의 목화를 지속적으로 자국 시장에 공급시키고 싶어했던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을 고심했지만 인권을 유린하는 흑인 노예제를 고발하는 해방 선언을 발표한 이후에는 남부의 지지를 철회했다. 그럼 만약에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했다면 어땠을까? 이러한 이야기에서는 온갖 주장이 오고가는데, 이들 두 나라가 총력전을 벌이듯이 했더라면 북부가 패하고 남부가 독립해 미국 역사가 달라졌겠지만,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을 비롯하여 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있는 여러 식민지에 진출하여 그 문제로 신경쓸 게 많았고 영국도 아프리카, 아랍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로 쳐들어가거나 장악한 식민지에서 프랑스처럼 저항을 신경써야 했으며 당시 강력한 적국으로 여기던 [[러시아]]를 [[그레이트 게임|견제해야 했기에]] 미국에 군사력을 오롯이 쏟아붓는 총력전을 벌이긴 힘들었으리라 하는 의견이 많다. 다만 남북전쟁 초기에는 북군이 남군보다 열세인 상황이었고, 이에 가장 강력했던 영국의 로열 네이비와 프랑스 육군이 북부를 밀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남군을 지원하며 북부를 틀어막기만 했어도 북군은 지속되는 열세를 버티지 못하거나 국지전만 펼치다가 남북전쟁 자체가 흐지부지하게 되었을 것이란 관점이다. 더군다나 북부의 바로 위에는 캐나다란 대영제국의 거대한 군사기지 역할도 수행이 가능한 국가가 있었기에 안 그래도 남부와의 전선에서 병력들을 소모해가던 상황에서 북부에 새 전선이 생겼다면 더더욱 이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캐나다를 통해서 영국군이 남하해 북부의 주요 산업 지대를 타격했다면 북부가 남부를 이긴 가장 결정적인 원동력이었던 거대한 산업력 역시 타격을 입었거나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을 수도 있다. 게다가 로열 네이비가 참전하면 미합중국 해군은 남부에 대한 해상 봉쇄를 할 수 없으니 남부의 경제 사정도 더 좋아질 것이므로 북부와의 경제력 격차는 더욱 줄어든다. 그러나 이 당시 미국은 북부의 국력만으로도 이미 영국, 프랑스도 쉽게 건드리기 어려운 레벨이었다. 캐나다가 군사기지 역할을 수행한다고 해도 당시 캐나다의 인구는 고작 100만명에 불과한 대부분이 그저 동토에 불과한 땅이라 미국 입장에선 병력 좀 보내서 오는 족족 때려잡으면 그만이다. 그게 아니라도 캐나다 동부의 주요 도시들 몇 개만 함락시켜도 이미 캐나다의 자체적 전쟁 수행능력은 그냥 마비다. 캐나다에 배치된 영국군은 현지군을 합쳐서 1만명이 되지 않았고, 캐나다에서 참전 반대 여론이 높았던 것도 영국이 전쟁에 참전하면 캐나다는 미군에게 그대로 밀려버릴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2,200만이 넘는 북부의 인구는 당시 국가들중에선 상당히 많은 편이었고 산업 생산능력 또한 이미 북부의 산업력만으로도 명백히 열강 레벨이었다.[* 본토 산업력으로 비교하면 이미 1860년의 미국은 프랑스는 확실하게 앞서고 영국과 엎치락뒤치락 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도 남북전쟁 동안 북부의 연 누적 동원병력은 무려 220만명에 달한다. 물론 당시 세계 1, 2위의 강대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가 국운을 걸고 총력전을 벌인다면 미국을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설령 성공한다고 한들 엄청난 손실을 감당해야만 할 것이다. 게다가 대서양 건너 수십만 단위의 대규모 육군을 파병하고 보급하는 것은 그 자체로 거의 악몽같은 일일 수밖에 없다. [[크림 전쟁]]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피똥을 싸게 될 것이 자명하다. 또한 노예해방 선언 이전 남부군이 북부군보다 승률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북부가 공세하고 남부가 맞아서 격퇴하는 방향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불런전투 전후 멕클레런이 이끄는 연방군은 웨스트버지니아를 향한 남부군의 공세를 격퇴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남부군에 비해서 강했던 해군을 이용하여 뉴올리언스를 점령해 서부 전선에서 압박을 가해오고 있었고 노퍽 해군기지로 들어가는 햄프턴 로드를 점령한 상황이었다. 햄프턴 로드 점령과 함께 개시된 반도전역에서 맥클레런이 남부군을 과대평가하여 리치몬드를 공략하지 않고 어영부영하다가 리의 일격으로 7일 전투에서 패배하며 리치몬드 조기 점령에 실패하였지만 북부군의 전력이 성공적으로 철수하며 보존하는데 성공한 상황이었다. 그나마 리가 7일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리가 메릴랜드로 과감한 기동 작전을 펼치면서 엔티텀 전투 이전까지 북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것이 남북전쟁기 유일한 북부의 위기였다. 1860년대 프랑스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라이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제국 사이의 고조되는 갈등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설사 참전했다한다 한들 프로이센을 옆에 두고 수십만의 전력을 차출해서 미국으로 보낼 사정이 전혀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단독으로 들어가기보다는 영국의 개입 여부를 지켜보며 멕시코를 찔러본 것이다. 영국으로 시선을 돌리면 트렌트 사건 등 양국간의 이런저런 갈등으로 그나마 참전 가능성이 높으나 전통적으로 영국은 해군 강국이지 육군 강국이 아니었다. 섬나라에 해운국이었던 영국은 해군을 위주로 군대가 편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앞선 미영전쟁때도 그리 많은 군대를 파견하지 못했고 국운을 걸고 코앞이던 유럽에서 싸우던 나폴레옹 전쟁 때도 10만을 넘지 않았다. 더 멀리가면 독일과 영혼을 걸고 싸우던 1,2차 세계대전때도 전쟁 초반에는 해외원정군이 10개 사단 안팎이었다. 참전을 했다면 캐나다와 카리브해의 강한 해군력을 동원하여 북군의 해군을 수세로 몰아넣고 남부의 보급을 호전시켜 줄 수 있겠지만 결국 승패가 결정되는 지상전은 남부의 손에 달린 문제가 된다. 그럼 마지막 유럽의 열강 프로이센으로 넘어가면 프로이센은 남부가 소중히 여기던 귀족 중심의 사회였음에도 노예에 딱히 관심도 없었고 1860년대 오스트리아와 독일 통일의 문제로 경쟁 중이었으며 프랑스와 영국과 달리 미국까지 가서 압도할 수 있던 해군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이러한 이유가 인도를 비롯한 신규 식민지 개척를 통한 남부에 대한 경제적 필요성 상실, 북부의 엔티텀 전투이후 노예해방선언으로 정치적 명분이 철저하게 북부로 넘어가면서 유럽은 초반의 중립에서 북부지지로 굳어진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