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정상회담 (문단 편집) === [[전두환 정부]] === 1984년 북한의 인도적인 대남 수해복구 물자 지원[* 이것도 경위를 알고 보면 상당히 골 때리는 사건이었다. 1984년 여름 남한에선 소양강댐이 터지네 마네 할 정도의 [[집중호우]]로 엄청난 숫자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이러자 북한은 조선중앙방송을 통해서 수해복구물자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는데, 이걸 당시 5공 정권이 덜컥 수락해버린 것이다. 북한에선 당연히 안받을줄 알고 언제나처럼 프로파간다 날린 건데 남에서 진짜 받는다고 해서 엄청나게 당황해 했다. 그래도 하여튼 준다고 했으니 빠득한 살림에도 의류원단과 식량, 건축자재(시멘트,철근) 등을 바득바득 긁어모아서 남으로 보냈다. 이때 북에선 나름 신경써서 고급이라고 보내온 물자들이 남쪽 기준으로 영 조악한 것들이라서 건축물 지으라고 준 시멘트를 [[광주대구고속도로|88올림픽고속도로]]에 부어버렸고, 오히려 국민들 사이에선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하여튼 이걸 계기로 오랜만에 남북대화가 재개돼서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고 잠깐 해빙기가 도래한다.]을 계기로 남북대화의 물꼬가 트이고, 이것은 남북 예술단 상호 방문 공연과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진다. 이러자 다음해인 1985년 북에서 대남정책을 전담하던 [[허담]] 대남비서 겸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이 극비리에 내려와서 [[전두환]]을 만났고, 답례차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비밀리에 방북해서 [[김일성]] 전 주석을 만났다. 이런 밀사접촉을 통해서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원칙적으로 합의했으나, 여러가지 내외부의 사정[* 특히 [[팀 스피릿]] 훈련이 가장 큰 문제였다. 북은 팀스피릿이 곧 대북선제공격 연습이라고 인식해서 훈련기간에는 국가를 전시체제로 돌리곤 했었고, 이것이 막대한 경제적 부담이었다. 당시 팀스피릿은 국군과 주한미군은 물론 미 본토의 증원군까지 도합 20만명 이상이 동원되는 육/해/공군 총력전 연습이라서 북이 위협을 느낄만 하기도 했다.]이 겹치면서 자연스레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당시 5공 정권은 [[1988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 정권의 사활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북한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또 남한의 올림픽 단독 개최는 곧 체제경쟁의 패배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던 북의 김일성 정권은 어떻게든 남한의 단독개최를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대외적으로 꾸준히 공동개최, 분산개최를 요구하던 시점이었다. 이런 남과 북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남북 밀사접촉이 이루어졌지만, 워낙에 입장 차이가 크고 결국은 각자 정권안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흐지부지 되고, 1986년이 되면 다시 남북간에는 극한의 긴장이 흐르게 된다. 결국 북은 전형적인 테러전술로 돌아가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일으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