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정상회담 (문단 편집) === [[노태우 정부]] === 남북정상회담이 최초로 제안된 것은 1988년이다.[* 이전에는 순도 100% 실무자들만 움직였다. 일부 인사들이 상대 정상을 만나려고 시도했고, 실패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했다. [[황태성]]이 박정희를 만나려다 실패한 것이 전자의 예이고, [[7.4 남북 공동 성명]] 이전에 [[이후락]]이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답례로 북한의 당시 부수상 [[박성철(1913)|박성철]]이 청와대에서 박정희를 만났던 것이 후자의 예이다. 하지만 이는 정상간의 만남을 노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을 통해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20여 차례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했다는 주장이 있다. [[http://www.mediapen.com/news/view/45164|관련 기사]] 8월 15일 [[노태우]]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의 정상회담 제안에 [[김일성]]이 용의가 있다고 회답한 것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9100028910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9-10&officeId=00028&pageNo=1&printNo=102&publishType=00010|관련 기사]] 하지만 성사 직전 결렬되고 말았다. 결렬된 배경에 대해서는 노태우 정부 입장에서 군부와 보수세력의 저항이 너무 클 것같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을 생각하고 포기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본인은 육성회고록에서 북한과 중국의 여건이 덜 조성되었다고 판단했고, 북한이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섣부르게 요구한다는 인상을 받으면서 정상회담으로 인한 실익을 거두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2011년 펴낸 회고록에서는 북한이 자신을 초청했으나 “김일성의 초청이 돈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장관의 말에 따라 초청을 거절했다고 밝혔다. 참고로 박철언은 노태우의 손아래 처남이자 최측근으로 노태우 정권에서 대북밀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박철언은 이외에도 한소수교, 한중수교 등 북방정책 전반에 두루관여한 인물이다.] 김일성의 회답으로 정상회담을 연다는 것은 일단 남북 간의 잠정적인 합의사항이 되었으나, 세부 사항 논의와 남북관계의 변동, 국내외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역사적인 회담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지연이 몇년간 계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