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상목 (문단 편집) == 생애 == 남상목은 1876년 4월 12일 경기도 광주유수부 낙생면 하산운리(현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에서 아버지 남진희(南晉熙, 1839 ~ ?. 12. 11)[* 남보희(南普熙)라고도 한다.]와 어머니 [[전주 이씨]](? ~ ?. 4. 16) 이승진(李陞鎭)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고향 인근에 있던 낙생면 판교리(현 분당구 [[판교동]])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힘이 셌다고 한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에는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조선을 상대로 수탈을 했는데 남상목이 살던 낙생면에서는 인근의 언주면과 돌마면 등에 있던 나무를 모두 베어 주민들에게 운반하게 시켜놓고는 보상금을 한푼도 주지 않은 일이 있었다. 이 일을 보고 남상목은 일본인 감독관이던 나카이(中井)를 두들겨 팼다. 이 사건으로 헌병대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렀지만, 반일정신과 민족의식을 쌓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돼 외교권이 강탈당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남상목은 [[충청북도]] [[제천시|제천군]]에서 활동하던 [[이강년]]의 부대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 1908년 8월에는 용인~충주에서 활동하던 50명의 의병을 이끄는 의병장이 되었다. 의병들은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패했으나 일본군에도 꽤 피해를 입히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1908년 11월 경기도 광주군에서 가족을 만나러 가다 잠복해있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고,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 고문을 받다 장 파열로 인해 11월 4일 옥사 순국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청계산 아래 후천골에 임시로 묻혔다가 [[8.15 광복]] 후 고향인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의 뒷내골 선산에 안장되었다. 그 뒤 [[분당신도시]]가 개발되고 인근에 도로가 건설되자 1990년 7월 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어 지금에 이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