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송 (문단 편집) == 평가 == 남송의 역사는 사실 사실상 황제의 역사라기보다도 [[군약신강]] 재상의 역사[* 사실 송나라 종실은 [[문치주의]]를 펼쳐 재상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 하물며 원래 수도를 빼앗겨 황제들이 치욕을 당해 황권이 실추되고 남쪽으로 이주한 처지였다. 이후 황제의 전제권이 강화되는것은 명, 청 시기부터이다. 물론 문치주의의 좋은점이 없던 건 아닌데, 그전에는 집안 빽과 인맥으로 괜찮은 관직을 차지하던 사람들이 주류였던 중국사가, 송나라때만 잠시 머리 좋은 사람들이 괜찮은 관직을 차지하게 바뀌었었다. 최종까지 과거시험 제도로 거의 대부분의 공무원을 뽑았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과거시험 중 기본적인 하위시험만 합격하면 극소수들만 합격하는 상위시험까지 안 가도 그중에서 빽있는 순서로 관직을 받는게 보통이었다. 물론 이 제도는 원나라 시대 이후 명나라나 청나라때 또 유명무실해졌다.]다. (+ [[상황]] 정치) 유명한 [[진회]]를 시작으로, 그나마 멀쩡했던 [[효종(송)|효종]] 이후로는 [[광종(송)|광종]]을 폐위시킨 [[조여우]], [[한탁주]]의 권력 투쟁(5년), [[한탁주]] 독점(12년), 한탁주 죽고는 [[사미원]](26년, 이때 금나라가 멸망했다) 그리고는 몽골의 침공 등으로 어수선했던지라 좀 조용한가 했는데 [[정대전]] 이라는 인물이 조정 내 입지가 급부상 하여, 독재 정치를 하였고(14년), 끝끝내 끝판왕 [[가사도]]가 나타났다. 그래도 [[맹공]]이라는 남송 최후의 명장과[* 맹공 이후 이정지, 왕견 등의 무장들이 있었다. 전자는 1276년 남송 황실이 투항했음에도 양주 지역에서 장렬한 투쟁을 벌였고, 한 명은 1259년 조어성 전투에서 몽케 칸의 군대를 막아내었다.] [[문천상]]과 [[진의중]] 이라는 남송 최후의 재상들이 분전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원나라]]에 대항해 합주 조어성([[중경]]) 등의 [[쓰촨 성|사천]] 지역이나 [[형주|강릉]], [[양양(중국 도시)|양양]] 등의 [[형주]] 지역에서 훌륭한 방어를 자랑했던 시절도 있었고 [[금나라]]를 역으로 위협하던 시절도 있었다. 또 근대화 전까지 막을 나라가 없었다던, 세계를 지배했던 몽골의 주공격을 두 번이나 격퇴했고 10여 년이나 몽골과 전면전을 한 유일한 나라였다. 송나라 군대가 약했다는 상식과는 다르게 남송의 군사력은 매우 놀라운 수준이어서 결사적으로 몽골의 주력과 싸워 버텨냈다.[[http://sldn84.egloos.com/2624532|남송의 군사력]] 뭐 당시 송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화포와 로켓을 날리던 국가였으니. 송나라 시절에는 대포가 없었고 투석기로 화약무기를 날렸으며 흔히 아는 대포의 형태는 원나라 때 처음 나타난다. 남송의 멸망이 1279년이고 [[여몽전쟁]]이 1231년에 시작되어 1259년에 끝났으니 [[고려]]가 [[몽골 제국]]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이미 세계가 다 뒤집히고 난 뒤가 아니라, 그때만 해도 남송이 멀쩡하게 있었던 상황이었다. 멀쩡한 것은 둘째치고 20년은 더 지나야 멸망했다. 물론 몽골과 전쟁해서 아예 그냥 물리친 나라도 있고, 점령당했다가 금새 몰아낸 나라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그런 나라들은 너무 멀거나 몽골군이 소수였거나 애당초 중요한 목표가 아니었거나 하는 경우였다.[* 그나마 예외는 베트남 정도, 이쪽은 무려 3차례나 침공했는데도 못 먹었다.] 반면에 남은 중국 북부를 장악한 몽골군의 지척이자 몽골군의 최고 주력군이 공격해가는 최대의 목표이자, 몽골 제국의 대칸([[오고타이 칸]], [[몽케 칸]])이 직접 '친정'하는 상대였음에도 불구하고 1235년부터 1279년까지 무려 44년을 버텼다. 그렇지만 당연히 이 44년 동안 몽골이 지속적으로 전력을 다 해서 남송을 공격한 건 아니다. 일단 몽골은 동시에 서부로 원정을 강행하기도 하였고, 내부에도 칸 자리를 놓고 내분이 많아서 남송을 치다가 회군하여 5년의 내전을 치렀던 일도 있었으며, 간신 [[가사도]]는 아예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을 맺어 몽골이 회군하게 하기도 하였다.[* 가사도가 몽골과 화약을 체결하였다는 부분은 현재 중국 사학자들 내에서 논란이 많다.] 하여 실질적으로 교전한 시간은 20년 정도로 집계된다.[* 그리고 그 남은 20년 동안 송은 따로 전쟁이 없었지만 몽골은 그동안에도 쉬지 않고 외부 정벌 혹은 내전으로 싸웠다.] 언급했듯 1258년도의 전쟁을 보면 몽골군 주력이 세 방향으로 갈라져 쳐들어 오는 와중에 삼군 중 일부는 저 멀리 운남 방향으로 돌아서 송나라를 치기도 한다. 이미 전방은 말할 것도 없고 후방 지역의 나라까지 다 털린 상태였음에도 송은 위에서 나온 대로 버텼다. [[오고타이 칸]]이 이끄는 군대가 1235년부터 1241년까지 계속 공격을 펼쳤으나 실패하고 우구데이 칸이 병사해서 퇴각에서 실패, [[몽케 칸]]이 이끄는 부대가 1258년 또다시 직접을 공격을 펼쳤으나 5개월 동안 아무것도 못해보다가 몽케 칸의 사망으로 퇴각해서 실패했다. 이후 [[쿠빌라이 칸|쿠빌라이]]가 대칸이 된 후 송나라 방위 라인의 핵심인 양양성을 주 타겟으로 삼아 공격해서, 수만 명의 병력에다 중동에서 가져온 공성병기까지 투입했지만 무려 6년 동안 함락을 못 시켰고, 양양 근처의 허약한 성을 일단 먼저 밀어버린 후 말라죽이는 전략으로 가면서 양양 성주 [[여문환]]에게 넌지시 항복을 권해서 겨우겨우 양양을 손에 넣었고, 양양성이 떨어진 후에야 겨우겨우 직접적인 타격이 가능해져서 20만 대군을 투입시키면서 그제서야 확실한 승기를 잡았는데, 이미 대세가 완전히 넘어간 후에도 송나라 황족들과 고관들은 무너지면서도 계속해서 물러나면서 버티다가 남쪽 바다 끝까지 몰릴 때까지 버티고, 결국 남쪽 끝까지 몰린 후 [[애산 전투|애산]]에서 '''정말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하다 장군이고 재상이고 황족이고 죽을 때까지 싸우다가 멸망한 것이다.''' 송나라가 문약하다며 비웃는 사람들도 이런 남송의 최후에 대해선 높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이후 남중국은 명나라 때에도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는 최고의 요지로 취급된다. 몽골과 남송의 전쟁 후반부인 1270년 무렵에 몽골과의 전투중 투항이나 무너진 지역 및 나라가 [[호라즘 제국]], 막북, [[서하]], [[서요]], [[금나라]], [[토번]], [[중동]], [[러시아]], [[동유럽]], [[고려]], [[대리국]] 등등이었는데 결국 멸망하긴 했어도 남송은 꽤 오래 버티고 있었다. [[바투]]가 저 [[폴란드]] [[레그니차 전투]]에서 하인리히의 군사를 전멸시킨 게 남송의 멸망보다 무려 38년 전이고 남쪽의 대리국이 몽골군에게 멸망당한 게 남송의 멸망보다 26년 전이었다. 바그다드 역시 남송보다 21년 먼저 무너졌다. 그렇게 먼 곳까지 쓸리는 와중에서도 코 앞에 있던 나라가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다. 남송은 북송과 달리 지방군 지휘관들의 권한이 강했기에 군벌이라는 위협도 존재했다. 실제로 남송 초기에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군벌세력들이 수도 임안을 포위하며 방어선에 구멍을 낸 덕분에 금나라가 일시적으로 임안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군벌세력중 하나인 한세충이나 악비 등의 활약으로 오히려 금나라가 밀렸는데 남송 정부는 금나라보다 군벌들을 우려하여 적당히 돈 좀 주는 것으로 전쟁을 매듭짓고 곧바로 군벌 숙청에 들어갔다. 즉, 남송과 싸우던 몽골이 다민족국가라 통합이 덜 되었다 쳐도 남송 또한 군사적인 부분에선 완전히 통합이 잘 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남송과 싸울 당시 몽골 제국은 화북지방과 중앙아시아, 중동, 동유럽 상당수를 먹어치운 대제국이므로 국력이 남송보다 많이 약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리고 남송의 화남 지역은 화북 지방에 비해 산악지대와 정글이 많아서 죄다 농경지는 아니었다. 당시 원나라의 경우 화북지방과 중동이라는 선진 문명권의 소프트웨어와 물력까지 흡수해 국력은 물론 군사력까지 괴물 수준에 이르던 초강대국이었다. 총 인구에서 남송보다 좀 밀리는 거지, 투사하는 역량을 보면 남송 못지않게 상당했었다. 그나마 밀리는 수군조차 화약병기를 보유한 육군의 보조로 격파하는게 원나라군이었다. 당시 원나라군은 몽골 기병대에서 여러 문명권의 기술력과 힘을 흡수해 하이브리드 군대가 되었고, 야전은 물론 기동전과 공성전 등 못하는 게 없는 올라운더 군대였다. 추가로 원나라는 화북 지방의 물력과 더불어 강력한 기병까지 갖춰서 몽골 기병대의 가공할 기동전을 봉쇄하던 남송의 요새화 영역을 보병-기병-수군의 연계를 통해 기병으로 통과하지 못하는 구역을 보병과 수군[* 몽골이 수군을 육성할 수 있었던 것은 남송 출신 항장 유정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본래 북방 한인이었고, 이후 맹공의 수하에서 활동하였으나 여문덕의 무시와 유흥의 사천제치사 부임으로 인해 불안해한 나머지 노주를 바치고 몽골에 투항했다. 유정 한 사람으로 인해 몽골군은 수군을 육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으로 길 열어주거나 송나라군의 반격 시도를 기병으로 분쇄시키는 등 유기적인 제병 합동으로 송나라의 모든 시도를 끝없이 격파하며 양쯔 강 수계를 체계적으로 장악해나갔다. 이는 쿠빌라이를 비롯하여 명장 바얀, 장홍범, 아링카야 등 남송과의 전쟁 경험이 매우 풍부한 인재들이 남송의 방어선을 파훼할 열쇠를 찾은 것도 원인이었다. 더불어, 남송은 군마 육성에 용이한 목초지대와의 접촉성이 떨어지는 곳이었기에 돈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기병 육성에서 몽골 기병을 따라잡는 것이 어려웠다. 무슨 경제력이 마법이라도 되는것 마냥 경제력 운운하는데, 막상 송몽전쟁 중후반에 들어설수록 남송은 유독 자연재해와 혹한기를 많이 겪으며 흉작 크리가 떠서 산성방어체제를 받쳐주는 생산력이 떨어진 것도 있었다. 예를 들면 석유 불모지에 돈 뿌린다고 해서 석유가 펑펑 터져나오는가? 그렇지 않다. 그 돈으로 석유를 수입하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할 것이다. 이렇듯 돈은 경제 수단이지 마법이 아니다. 북송의 고질병이었던 비대한 금군 본위의 군 체제가 남송 시기 이후 각 지방 단위의 상비군이랄 수 있는 둔수 대병 위주의 방어 체계로 개편된 덕도 있다. 북송의 경우, 상비군의 규모 자체는 거란, 서하와의 전쟁이 한창이 때는 무려 140만 정도까지 불어날 정도로 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황제가 비서 기관인 [[추밀원(중국)|추밀원]]을 끼고 직접 전군의 군령권, 발병권을 행사하는 구조 자체가 군에 대한 문치에 있어서는 좋았을 지 몰라도 시시각각 변하는 전선의 사정에 맞서 응변하기에는 참으로 비효율적인 체계였다. 무엇보다 수내허외, 즉 안을 든든히 하고 밖을 허약하게 하여 만당 시기 같은 지방 번진들의 발호를 막는다는 명목하에, 무려 전군의 2/3에 달하는 82만 명을 황제 직속 금군에 소속시켜 그중 대부분을 수도인 동경 [[카이펑시|개봉]]부에 주둔시켰는데, 오늘날의 물색에 비견하자면, 62만 [[대한민국 국군]] 중 무려 40만가량이 동부나 서부 전선이 아니라 [[수도방위사령부]] 소속으로 서울 관내에 주둔하는 격이다. 물론 이 금군들이 수도만 지키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수도 주둔이 베이스였던 만큼 변경의 사정에 군 구성원들이 자동적으로 어두워지는 건 정한 이치고, 그로 인하여 작전능력이 날이 갈수록 현저하게 저하되는 부작용이 있었다. 거기에 송나라의 경우, [[석경당]]이 [[이종가]]의 후당을 멸망시키고 황제가 될 욕심에, 거란의 지원을 받을 심산으로 만리장성 이남 연운 16주(지금의 [[베이징]]을 위시한 [[허베이 성]] 일원)을 [[거란]]에다가 가져다 바친 환경하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북방 방어선 구축에 있어서도 전대의 다른 중국 통일 왕조들에 비해 상당히 애를 먹어야 했다. 헌데 남송으로 밀리고 나서는, 국경지대의 지리적 조건 자체가 장성 이남에 거란을 끼고 있어야 하는 악조건에서, 회수, 장강, 사천 준령 등의, 하늘의 내린 방벽을 국경으로 삼는 호조건으로 바뀌게 되고 비대하기만 했지 제 구실을 못하던 금군 위주의 방만한 군대는 [[한세충]], [[악비]] 같은 근왕 군벌들이 직접 모병한 정예 둔수 대병들을 주축으로 충실하게 재편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군벌들의 발호를 걱정한 [[고종(송)|송고종]]이 진회를 앞세워 실행한 정치적 조처로 인해 악비는 처단되었고, 한세충은 축출되었다.[* 이론의 여지는 있을수 있다 오늘날에도 악비, 한세충 숙청의 본의가 송 고종, 진회 누구한테 더 쏠리는지는 연구 대상이기 때문이다.] 한때 40만에 달했던 둔수 대병들은 21만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남송기 금군의 역할을 담당한 삼아제군의 규모가 13만 내외였던 걸 상기하면 북송 기에 비해서는 상당히 지방군과 중앙군의 밸런스가 이상적으로 재조정 된 거라고 봐야한다. 이후 남송은 금 [[해릉양왕]]의 남정군을 문관 우윤문이 장강 남안 [[채석기 전투|채석에서 격파]]하고, 구대륙에서 몽골을 상대로 가장 오래토록 버티는 등 멸망할 때까지 상당히 견실한 방어력을 자랑하게 된다. 험요지에 국경을 이뤄놨던 바탕에 강남의 경제력 포텐셜이 최대로 터진 시기인 것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강력한 방어선에 풍부한 물자 보급선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 역시 남송이 버틸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이었다. 실제로 남송 시기는 본격적으로 강남이 잦은 전란으로 무너진 강북의 경제력을 능가하기 시작한 시기로 평가된다. 물론 위에 링크된 블로그를 봐도 알 수 있듯 북송 시기의 경제력이나 군사력 지탱이 힘들다면서 [[효종(송)|송효종]] 및 남송 지식인들이 투덜거리는 장면도 있으나 남송 후기쯤 가면 경제력도 매우 융성하여 남방과 사천 지역에서 끊임없이 생산되는 물자, 험준한 지형을 바탕으로 세워진 요새들은 몽골군의 침공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앞서 언급한 사천 지방의 조어성이 이런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 세워진 튼튼한 요새의 대표적 예였는데 이곳은 또 물자가 풍부하게 준비된 곳이어서 송의 수비군이 물고기와 밀가루를 몽골군에게 던지며 우린 10년도 더 버틸 수 있다고 조롱했다. 군사력은 영토가 넓음에도 고려보다도 약하다고 현대에 평가 받고 있다. 영토도 넓어 보이나 대부분이 산지라 사람이 살기 어렵다.[[https://mlbpark.donga.com/mp/b.php?p=151&b=bullpen&id=202008140046189832&select=&query=&subselect=&subquery=&user=&site=donga.com&reply=&source=&pos=&sig=h4aRGg2Yih9RKfX2h3aXHl-A5mlq|#]] 그래도 워낙 영토가 넓어 고려보다 평야는 몇배는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