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승룡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932 전일본선수권과 1933 극동선수권에서 잇달아 우승했으며, 일본건국기념 국제마라톤에서는 [[1934년]]과 [[1935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그 후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손기정을 제치고 1위로 골인하며 일본 대표로 뽑혔다. 원래 일본에서는 [[손기정]]은 세계 최고기록 보유자이니 마지못해 선발하더라도, 남승룡은 뽑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권태하 코치[* 4년 전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출전해 마라톤 9위를 했으며, 광복 후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와 당시 조선 육상계의 후견인 격이었던 기업인 [[정상희]]가 "선발전 1위를 한 선수를 탈락시키자니 무슨 헛소리들이냐"고 강하게 반발했고,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 일본 최초의 금메달을 딴 육상 영웅 [[오다 미키오]][* 오다 미키오는 스포츠에 관해서는 상당히 공정한 성향이었는데 서술했듯 정상희가 남승룡을 뽑자고 주장했고 미키오가 이에 동조하며 '남승룡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또한 당시 일본의 마라톤 코치이자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권태하가 앞지른 일본인 선수 중 한 명인 쓰다 세이이치로의 보복 우려가 크자 권태하 코치가 쓰다 코치를 잘라야 한다고 주장한 '쓰다 기용불가론'을 미키오가 스포츠부 부장으로 있던 [[아사히 신문]]으로 보냈고 이를 [[아사히 신문]]에서 보도해 쓰다 코치가 결국 해고되는 등 조선인 선수들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320|#]]]가 남승룡을 지지하면서 논란이 정리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참가한 [[1936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2시간 31분 42초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땄다. 2위로 앞서 골인한 영국의 어니스트 하퍼는 거의 실신할 듯이 기진맥진한 반면 남승룡은 완주하고도 기운이 남아서 제자리 뛰기를 하며 [[손기정]]에게 축하의 말을 건낼수 있었다. 그의 동메달 획득은 막판 스퍼트로 30명 정도의 선수들을 앞지른 결과였다는 점에서 놀라운 것이었다. 본래 남승룡은 후반에 전력 스퍼트하는 스타일이었고, 만약 조금만 빨리 역주하기 시작했다면 손기정과 함께 금-은메달 석권도 가능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로마자]] 표기는 [[일제강점기|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은]][* 일본어가 되는 사람은 알겠지만, 한국식 한자 이름을 일본식으로 음독한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창씨개명을 했다면 난 쇼류가 아닌 미나미 쇼류 등으로 읽어야한다. 창씨개명이 아닌 일제강점기로 링크한 이유가 이것. 그리고 본격적으로 창씨개명을 시행한건 1940년부터다.] '난 쇼류'(Nan Shoryu)를 사용했다. ||[[파일:손기정_1936.jpg|width=100%]]|| 그는 당시 금메달을 차지한 [[손기정]]을 평생 부러워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메달의 색 때문이 아닌, [[일장기 말소사건|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릴 수 있어서.]]"라고 회고했다. 당시 시상대 사진을 잘 보면 손기정이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리는 가운데, '''남승룡은 어떻게든 바지를 명치까지 끌어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일장기를 가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한다.[* [[https://youtu.be/qthKw1zFnZ8|영상]]을 보면 손기정과 마찬가지로 남승룡 선수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미가요가 울릴 때 특이나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메달을 땄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잃은 두 청년의 슬픔이 드러나는, 참으로 슬픈 장면이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나 해방 후 용산철도국 마라톤부 감독을 사직하고 손기정과 함께 후배 양성을 하던 중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때 손기정의 운동화를 선물받은 미국 켈리 선수의 안부엽서를 받은 손기정이 그 안부엽서에서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처음으로 알게 된 후 남승룡과 의기투합하여 후배이자 함께 가르친 제자인 어린 후배 서윤복을 데리고 대회에 출전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렇게 참가하게 된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당시 36세의 노장이었음에도[* 21세기에야 체계적 몸관리로 이 나이에도 활약하는 선수들이 많지만 당시는 무려 [[1940년대]]였고, 남승룡은 이미 은퇴하고 감독을 한 지도 오래된 상태였다.] 12위라는 성적을 거두며 건재를 과시했다. 출전한 이유도 아직 마라톤 초보인 서윤복 선수의 [[페이스메이커]]를 자처한 것도 있지만, '마지막으로 가슴에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달고 뛰고 싶었기 때문' 이었다. 이 대회에서 [[서윤복]]은 '''우승'''을 차지했다.[* 서윤복은 이 대회에서 손기정의 올림픽 최고 기록을 갱신하며 손기정의 자리를 물려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