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은 (문단 편집) == 평가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과 졸기를 보면 대체로 책략을 많이 낸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과 조준이 [[정책]]을 만들고 추진하는 사람들이었다면 남은의 경우는 이성계의 [[정치]] [[책사]]에 가까웠던 셈. "이씨가 개국한 데에는 조준과 남은의 공이 크다."는 식으로 말한 [[태종(조선)|이방원]]이나 "개국의 공은 모두 남은에게 있다."라고 태종에게 상언한 [[조인옥]]의 말 등을 보면 조선 개국 당시의 활약이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반대로 말하면 '''알려질만한 행보가 아니었다'''는 소리도 된다.]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조선]]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한 [[사상가]]''', [[조준]]이 '''[[고려]] 말의 문제점들을 [[개혁]]하고 조선 왕조 [[행정가]]'''의 면모가 강해 이성계도 막 대하지는 않는, 이성계가 초빙해서 영입한 일종의 [[정책]]적 스승 같은 느낌이었다면 [[남재]][* 형인 남재의 졸기에 "태조를 추대하는 모략이 재에게서 많이 나왔다."라고 하는 부분도 있는걸 보면 남재도 책사로 활동한 모양.], 남은 등은 이성계의 지근거리에서 계속 '''보필하며 크고 작은 정치 문제에 의견을 내는 [[참모]] 역할'''이었던 것. 즉, 이성계와 달라붙어 다녔을 시간이 길 수 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이방원 등 이성계 집안 사람들과도 자주 오고가며 얼굴을 보았을 터이니 남은 등에 대한 태종의 후한 평가도 여기서 나왔다고 보인다.[* 고제의 사람들로 비유하자면 정도전이 장량, 조준이 소하였다면 남은은 진평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로 따지면 법정이고.] 실제 남은이 [[공양왕]]에게 강경한 어조의 상소문을 올리는 일이나 폐위시키는 모습은 조금 각색이 들어가면《[[삼국지연의]]》[[화흠]]의 축소된 오마주. 아래의 기사를 보더라도 태조를 추대하는 계책을 그가 주동하여 정도전, 이방원 등과 모의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6월, 공양왕이 태조의 사제(私第)에 거둥하여 병을 위문하였다. 남은(南誾)이 위화도(威化島)에서 군사를 돌이킨 때로부터 조인옥(趙仁沃) 등과 더불어 비밀히 태조를 추대하기로 의논하였는데, 돌아온 후에 전하(殿下) (태종) 에게 알리니, 전하 (태종) 가 말하기를, > >"이것은 대사(大事)이니 경솔히 말할 수 없다." > >하였다. 이때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다투어 서로 추대하려고 하여, 혹은 빽빽하게 모인 많은 사람이 있는 중에서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소속된 데가 있는데, 어찌 빨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지 않습니까?" >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전하 (태종) 가 이에 남은과 더불어 계책을 정했는데, 남은이 비밀히 평소부터 서로 진심으로 붙좇은 조준·정도전·조인옥·조박(趙璞) 등 52인과 더불어 태조를 추대하기를 모의했지만, 그러나, 태조의 진노(震怒)를 두려워하여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전하가 들어가서 강비(康妃)에게 고하여 태조에게 전달되도록 하였으나, 강비도 또한 감히 고하지 못하였다. 전하가 나가서 남은 등에게 일렀다. > >"마땅히 즉시 의식(儀式)을 갖추어 왕위에 오르심을 권고해야 될 것이다." >---- > 태조실록 1권, 총서 133번째기사 여타 드라마에서 정도전에게 많은 역할을 몰아주다보니 [[스포트라이트]]가 정도전에게 집중된 측면이 있지만[* 사실 그 [[정도전]]도 2010년대 와서야 행적이 재발굴된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남은도 아예 배제된 건 아니라 주요 인물로 등장하긴 한다.], 실록 기사를 중심으로 보면 '''실제 책사의 역할은 남은, 남재 형제가 더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처세술]]에도 일가견이 있어, 한번은 이성계와 같이 술을 마시며 예전의 일을 이야기 하는데 술잔을 서로 주고 받아 친하기가 옛날과 같았다 고 하며, 공격을 받을 일이 있어도 이성계가 신임하고 총애하는 신하라 그런걸 묻지도 않았다고 한다. 한번은 이성계가 남은과 남은의 아버지인 남을번을 불러 같이 배를 타고 노는데, 늙은 남을번이 술이 거나하게 올라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니 그 모습을 본 이성계는 울컥해서 남은에게 "경은 부모가 모두 계시고 몸이 재상이 되었는데, 나는 비록 오늘날 일국의 임금으로 귀하게 되었다 해도 어찌 경에게 미치겠는가?"라며 울었을 정도. 심지어 반대 세력인 이방원 일파와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남은에 대한 태종과 신료들의 태도는 정도전에 비하면 비교도 안될 정도로 호의적인 것으로 실록에 남아있다. 실제 남은은 무인정사에서 참화를 당하지만 사후 이방원으로부터 직접 복권을 받고 태조 묘정에 배향된다. 또 태종조에 태조의 [[배향공신]]을 선정할 때 남은이 후보로 올라왔다가 떨어졌는데, 만일 남은이 역적으로 규정되었다면 감히 태종 앞에서 후보에 올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거기다가 이때는 탈락했지만 세종 즉위 후 태상왕으로 있던 태종은 과가 없는건 아니지만 공이 더 크다고 하며 몇몇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 [[배향공신]]에 추가시켜 준다. 또 조선 초기 곤장 백 대를 때려 조선 건국을 반대하던 이숭인 일당들을 죽여버린 사건에 대해 태종 시기에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태종은 [[정도전]], 손흥증, [[황거정]] 등에 대해서 벌을 내리면서도 유독 남은에 대해서는 "개국의 공이 있으니 논하지 말라"라고 넘어가며 죄를 묻지 않았다. --이쯤되면 나머지 애들은 많이 억울하다-- 대간에서 수차례나 "남은에 대해서도 죄를 물어야 한다."는 의견을 올렸지만 태종은 끝까지 이를 묵살했는데, 이를 보면 남은이 확실히 밉보이진 않은 모양.[* 태종은 훗날 아예 "이럴 때 남은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식으로 대놓고 그를 그리워하기도 했는데, 본인이 죽여놓고 또 한편으론 (정치적인 목적이든 진심이든 뭐가 됐든) 그리워했다는 점에서 본인이 독살했다는 의혹도 떠도는 [[경종(조선)|황형]]을 그리워한 [[영조]]도 문득 떠오르는 대목이다.] 물론 상기했듯 이방원도 남은을 완전히 믿진 않았기에 이성계가 살아있던 상황에 책사적 기질이 다분한 남은을 죽인 것[* 다만 이 부분에서 실록에서의 기록은 너무 축약이 되어있는지라 사망 정황이 이방원 통제 하였는지 아니면 극한의 긴장 상태에서 자세한 조정 내 인간관계를 알기는 어려운 병사들이 정도전과 남은을 일체화해서 이방원의 통제권 밖에서 벌인 일이었는지는 추가 조사 및 참고 기록들이 필요하다. 남은 자체가 자진 출두를 한 것을 보면 남은 본인이 이방원과 사상에서의 간극이 크지 않고 현위 군주에게 충실했던 입장으로 서로 이해될 가능성을 더 크게 봤다는 정황 증거가 다분한 측면이 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수백명 이상의 병사들이 무인정사를 위해 동원된 정황증거가 많은데 정치적으로 민감한 [[살생부]]의 명단에 대해 알고 있을 만한 [[무인정사]]의 중심 인물들이 이런 대규모의 병사들 모두를 통제하기에는 한계가 있다.]이고, 이후에는 권력이 자신에게 넘어왔기에 반대 세력을 보듬을 필요가 있어 상대측의 우두머리였던 정도전, 남은 중 정도전은 깎아내리면서 남은은 고평가하는 행보를 보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도 어찌됐든 정치 참모였던 남은의 역할 특성상, 조정의 여러 신료들과 다방면으로 인맥을 맺고 필요할때 여론을 주도하는 등의 행동을 하며 마당발 면모를 보였으니 더 이렇게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