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정임 (문단 편집) == 활동 == * 1964년 [[성신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하였다.[* 같은 학과 같은 학번 친구가 가수 [[남진]]이다.] 1965년 5월 [[KBS]] 5기 탤런트로 입사하였고, 그 해 11월에 연방영화사의 이광수 원작의 [[유정(영화)|유정]] 공모전에서 여주인공 '남정임'역으로 영화계에 화려하게 데뷔하였다.역할명이 곧 예명이 된 셈.[* 당시에 이미 선배배우인 [[이민자(배우)|이민자]]가 있었던 것도 예명을 쓰는 이유가 됐다.] * 1966년 데뷔작 '[[유정(영화)|유정]]'이 흥행에 크게 성공하여, 순식간에 인기 배우가 되었다. 당시 대학생이 드물고 특히 [[여대생]]은 더더욱 드물던 시절이라, 여대생이라는 조건은 그녀의 인기에 상당한 플러스 요인이 되었으며 [[고은아(1946)|고은아]], [[문희]]와 함께 톱스타로 성장하게 된다.[* 아직 윤정희는 데뷔 전이었다. ] 영화계 데뷔 초에는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고은아와 경쟁하였고[* 고은아 역시 톱스타이긴 했으나, 영화제작자인 곽정환 사장과의 이른 결혼으로 이후에는 그 전처럼 크게 활약하지는 못하게 된다.] 이후 문희가 인기를 얻게 되고 뒤이어 윤정희가 데뷔하면서 본격적으로 '트로이카' 시대를 열게 된다. 트로이카 중 윤정희는 선역과 악역을 아우르는 만능미를 보여주고, 문희가 눈물연기를 중심으로 버림받는 여자를 연기하는 비련미를 주로 보여주었다면, 남정임은 예쁜 얼굴과 특유의 발랄함을 무기로 명랑미를 과시하였다. 데뷔 초 역할들을 보면 밝고 명랑한 역할들이 대부분이었다. * 1971년에 [[재일교포]] 사업가와 결혼하였다. 당시 [[민주공화당]]의 당의장이었던 [[백남억]] 의원이 주례를 서려 했으나 불발하고 대신 모교인 [[한양대학교]]의 총장인 김연준 박사가 주례를 섰다. 당시 결혼식의 장면은 남정임의 은퇴작인 '첫 정'의 장면으로 쓸 예정이었다. 많은 연예인들이 하객으로 참여했는데, [[신영균(배우)|신영균]]의 경우에는 뒤늦게 오던 중 수많은 인사들로 옷이 찢겨졌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의 사업 문제로 이혼 후 1976년 '나는 고백한다'로 복귀를 했으며 영화보다는 드라마를 위주로 출연했다. 그 중 하나가 한국 최초의 옴니버스 드라마라 불리는 '여고 동창생'. 복귀 이듬해에 애인(이후 결혼)의 폭행을 오빠의 폭행으로 바꾸려고 하다가 들통나고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게 되자 음독을 시도하는 등 시련이 있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출연 정지를 받았다. 재판을 받는 와중에 연인과의 결혼을 발표하였으며 1978년에 재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1989년 6월 유방암 판정을 받고 1992년 [[유방암]]으로 사망하였다. 죽기 전 자신의 일생을 다룬 영화를 찍고 싶어 했다고 한다. * 중학생 시절 소풍을 갔다가 영화 촬영 중이던 [[김지미]]와 마주친 적이 있는데 이 때 중학생 남정임을 본 김지미는 “예쁘게 생겼다. 커서 배우가 되면 좋겠다.” 라며 칭찬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그 여학생은 배우로 데뷔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