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조(왕국) (문단 편집) === 남조의 전성기 === 779년, 남조에서 각라봉이 죽고 효항왕 [[이모심]]이 즉위했다. 곧이어 도읍을 태화성에서 양저미성(羊苴咩城)으로 천도했다. 이모심은 [[토번]]의 첸포 [[치송데첸]]과 연합해 무릇 20만의 군사를 발동해 당의 변경을 침탈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남조가 이 전투에서 당군에 패배하자 토번은 책임을 남조에 전가시켰고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이모심은 토번의 위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었던 당의 관리 정회는 이모심을 설득하였다. 정회는 “중국은 예의가 있어서 강제로 요구하는 것이 적습니다. 토번이 탐욕스럽고 모질기가 끝이 없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을 버리고 다시 당에 귀의한다면, 멀리 변방수비에 병력을 제공하는 수고가 없을 것이니, 이보다 이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결국 이모심은 당에 내부하기로 결정했다. 793년, 남조는 비공식적으로 당에 내부하였고, 토번은 이 사실을 몰랐다. 그런데 때마침 토번은 위구르 제국과 서역의 패권을 두고 대립하고 있었다. 토번은 남조에게 차출할 군사를 요구했다. 이모심은 군사를 보냈지만, 산천에서 토번군의 후미를 공격해 대파시키고, 토번의 속국왕 5명을 사로잡았다. 남조의 태도가 돌변하자 토번은 반격을 가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 토번은 내분으로 [[동아시아]]의 패권 중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795년, 치송데첸의 아들 무르크 첸포가 재상의 아들을 살해한 것이 발단이었다. 2년 뒤 치송데첸이 붕어하자마자 바로 즉위 문제로 내분이 일어났다. 따라서 남조는 토번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고, 당 제국에게서 귀부한 대가로 하사품을 받으며 남조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소성왕 권풍우가 붕어하고, 경장제 [[세륭]](世隆)이 집권하면서 남조의 전성기를 이어갔다. 세륭은 더 이상 남조가 당의 속국이 아님을 대내외적으로 표방하기 위하여 국호를 대례(大禮), 연호를 건극(建極)이라 칭하였다. 또한,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와 수주 등 당의 변경을 침공하였다. 당시 당은 세계제국으로서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조의 팽창을 막을 수 없었고, 남조는 여세를 몰아 촉의 [[성도]]성까지 진격했다. 877년, 세륭이 붕어하고 뒤이어 성명문무제 융순(隆舜)이 즉위했다. 융순은 일찍이 당과 친교를 맺기 위하여 사신 양기굉(楊奇肱)을 당에 파견하여 혼사를 성사시키려 했다. 당 제국은 당시 [[황소의 난]]이 평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혼사를 뒤로 미뤘고, 희종이 환도를 했으나 공주의 혼사는 중지되었다.[* 오로지 [[자치통감]]에서만 혼사가 이뤄졌다고 나오는데 [[신오대사]]와 [[신당서]]에는 장안 수복 뒤에도 혼사 문제는 중지됐다고 나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