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문단 편집) === 사노맹 사건 === 당시 안기부 [[김영수(1942)|김영수]] 제1차장은 1990년 10월 30일 TV 기자회견을 통해 “사노맹은 종전의 [[지하혁명조직]]과는 달리 자신들이 혁명적 사회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엄청나게 큰 규모의 사회주의 혁명조직”이라고 실체를 규정하고 노동계 230여 명, 학원계 1,030여 명, 종교계 청년운동단체 90여 명, 민중당 30명, 청년운동그룹 230여 명 등 모두 1,600여 명에 달하는 조직원을 가졌다고 발표했다. [[국가안전기획부]]는 1990년 9월 19일 현정덕 등 3명을 ‘사노맹 사건’으로 구속하였으며 1990년 10월 중순경까지 18명을 구속하였다. 이후 [[박노해]]가 중앙위원직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도 발표되었으며 1991년 3월 10일 박노해는 구속되었다. 박노해는 김일성의 생일인 1989년 4월 15일자 <박노해 시인의 긴급호소 북조선과 김주석은 남한 민중의 벗인가 적인가>라는 유인물에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란 [[http://theme.archives.go.kr/next/pages/viewer/archiveViewer.jsp;jsessionid=39qcPS9s9GEdvor2yfA3bEXcD1xTJJYYQ2EaZF2mDMghOp4SOWMoDA81acS2WLah.CW-MOBILE_servlet_engine1?archiveId=0001221083&singleData=N|시[* 공안연구 103P 참조] ]]를 실어 국보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1991년 3월 12일에는 조직의 핵심인 박기평(필명 박노해)·김진주 부부 등 사노맹 관련자 6명이 추가로 구속되었다. 1992년 4월 29일 국가안전기획부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이끌던 사노맹 중앙위원장 백태웅(29,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 등 사노맹 조직원 39명을 검거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의 구성 및 그 수괴 임무 종사의 혐의로 기소하였다. 안기부는 해방 이후 최대의 지하 조직 사건이라고 발표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