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형우 (문단 편집) ===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 1919년 4월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와 군자금 5천원을 지참하고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대표해 [[중화민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4월 13일 [[여운형]], [[신채호]], [[조소앙]], [[이회영]], [[이시영(정치인)|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도하고, 법무차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달 25일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된 뒤 의원자격심사위원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해 5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는데, 이후 잠시 귀국했다가 창원군 3.1 운동 주도 관련 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 해 9월 29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다이쇼 시대|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에 대해 고등법원으로 이송되어[[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59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8349&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구금되었다가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내란죄 혐의에 대해 [[공소권 없음]]으로 [[면소]] 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842&evntId=0034980207&evntdowngbn=Y&indpnId=0000011997&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 출옥 후 재차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20년 11월에는 교통총장에 보임되어 교통국 등을 운영하였다. 그 후 1921년 4월 사임할 때까지 임시정부 법무총장과 교통총장으로 일하였다. 1921년 [[베이징]]의 군사통일회와 [[간도]]의 액목현(額穆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돈화시]] 어무(額穆)진.] 회의 등에서 의견 차이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각기 다른 [[국민대표회의]]를 계획하게 되자, 상하이와 베이징 사이를 오가며 절충하려 노력하였다. 이후 그는 1923년 1월 3일부터 그 해 6월 7일까지 74차례에 걸쳐 열린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의 대표적 인물로 활약하였는데, 무능하기 짝이 없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본격적인 무장투쟁으로 나아가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와 병행해서 1922년 4월에는 배천택(裵天澤)·서동일 등과 베이징 마사묘(麻四廟)[*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하이뎬구]] [[이화원|이허위안]]로5호 [[베이징대학]] 캠퍼스 내에 위치했었다고 하는데, 확실치 않다.]에서 '무언실행(無言實行)'을 행동 지침으로 하여 부일 협력자를 처단하는 "다물단(多勿團)"[* 다물(多勿)은 [[고구려]]말로 '옛 땅을 회복한다'는 의미라고 한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13448|#]]][* 이회영의 조카 이규준, 이회영의 장남 이규학 등도 여기에 참여하였다.]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그 후 다물단은 실제로 수많은 친일파와 일제 밀정들을 암살하였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서북협성학교 교감이자 [[김활란]]의 형부였던 김달하를 들 수 있다.[* 김달하는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의친왕]] 이강의 부스승이기도 하였다. 서우학회와 서북학회에서 활동하며 [[이승훈(1864)|이승훈]], [[안창호]], [[이상재]] 등과 친하게 지내다가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옮겨 베이징에서 거주하면서 중국 [[북양군벌]]의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 정부의 시종관부 부관으로 일하면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정보를 일본에 제공하였다. 1925년 3월말 다물단의 이인흥, 이기환 등에 의해 처단되었다.] 1922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 문제로 임시정부가 혼란에 빠지자, 국민대표회의의 주비위원장으로서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과거의 분규와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완전 확실한 방침을 수립하여 독립운동이 통일적 조직적으로 진행할 것"을 선언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2년 7월에는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이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1924년 1월 다물단원인 서동일을 국내에 잠입시켜 [[경상북도]] [[청도군]]·[[경산시|경산군]] 등지에서 군자금 1,400여 원을 모집하여 송금하게 하였으며, 1924년 5월 30일 재입국한 서동일과 배천택에게 재차 군자금을 모집케 했다가 이듬해 1925년 두 사람이 활동 도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군자금 모집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이때 남형우도 수배 대상에 있었으나 그 해 7월 2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공갈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받았다.[[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618&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9398&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1926년 5월 20일에도 같은 혐의에 대해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무죄 판결을 내린 기록이 보이며[[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774&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2053&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1928년 1월 16일에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폭발물취체규칙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협박, 살인미수, 사기 등의 혐의에 대해 기소중지로 [[불기소처분]]을 내린 기록이 있다.[[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633&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9607&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 한편, 그는 1928년 가족들을 이끌고 베이징에서 [[만주]] [[하얼빈]]으로 함께 이주하여 [[헤이룽장성]]에서 사설학원(學院)을 경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