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내명부 (문단 편집) === 나인(內人) === 애기항아가 관례를 치르면 나인이 되었다. 견습나인에서 승격되었으며, 정식으로 여관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월봉과 품계를 받았다. 나인의 품계는 종9품에서 정7품이었다. '''항아(姮娥) 님'''이라고 부르며 서로를 '김 씨 형님'이나 '박 항아님' 등으로 불렀다. 선배 상궁들은 그들을 부를 때 '이가 봉림', '성가 순아' 등으로 불렀다. [[여말선초]] 시대 [[목은 이색]]의 시문집인 《목은시고》에 따르면 '붉은 소매'라는 뜻이자 미인을 비유하는 '홍수'(紅袖)라고도 불렸다. 본래는 입궁 후 15년이 지난 후에 관례를 올렸는데, 처소마다 관례를 올리는 연령이 달라졌다. 가장 어린 나이에 입궁하는 지밀(至密)에는 3~4세에 들어온 애기나인도 있어서, 18~19세 정도에 관례를 치렀다. 늦은 경우에는 15세가 넘어서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때는 30세 정도에 관례를 치렀다. [[구한말]] 궁녀들은 전체 평균으로 봤을 때 4~10세였는데, 관례를 15~18세 정도에 치렀다는 일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 [[조선]] 후기 이후부터는 10년 언저리에 관례를 치르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유교]]적으로 아무리 관례는 늦어도 20세 이내에는 하라고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너무 늦어지는 건 곤란했다. 4세에 입궐한 [[순헌황귀비 엄씨]]가 30세에 이미 시위상궁이었던 것도, 10년 언저리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15년 뒤 이미 상궁이 될 수 있었다. 민간에서 계례를 [[결혼식]] 직전에 행하는 것과 같이, 궁녀들의 관례는 결혼식과 유사했다. 궁녀가 된다는 것은 왕의 여자가 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관례 의식은 결혼식처럼 꾸며졌으며, 나라에서는 겉옷을 내려주고, 본가에서는 옷이나 세간, 음식을 보내왔다. 본가에서도 나름대로 집에서 결혼식에 버금가는 잔치를 하고 조상에게 예를 올렸다. 본가에서 올린 잔치 음식은 처소의 가장 웃어른까지 전해졌는데, 만일 대비전에서 일하는 궁녀라면 음식이 대비에게까지 올라갔다. 이때 소속 집단에 따라 지밀, 침방, 수방은 떠구지를 얹은 성장수식(전통 결혼식 헤어스타일)을 했고, 이외에는 화관을 썼다. 관례를 결혼식으로 치렀던 만큼, 흔히 드라마에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실제 나인들은 여염집 마님처럼 [[비녀]]를 꽂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관례를 치른 나인에게는 따로 방이 주어졌는데, 반드시 2명의 나인이 함께 쓰도록 되어 있었고 이들은 상궁이 될 때까지 두 사람이 동거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심부름하는 하녀도 1명씩 배치되었다. 나인은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당의처럼 생겼지만 당의와는 달리 겨드랑이 쪽이 막혀 있는 초록색 곁막기(肩幕衣:견막의)를 입었다. 오후 4시 이후에 밤을 새는 당번으로 갈 때는 곁막기를 입지 않고, 분홍 치마에 노랑 저고리나 연두색 저고리를 입었다. 야간 근무시에 곁막기를 입지 않는 것은 잠도 자야 하기 때문이었다. [[고종황제]] 시절에 황제와 황후가 노랑색을 입으면서 이것도 바뀌어 남색 치마와 옥색 저고리를 입게 되었다. 젊은 궁녀들은 소가죽으로 안감을 대고 홍색 천으로 겉을 댄 신발을 신었다. 조선시대는 의외로 여성 흡연율이 높았는데, 특히 궁녀들의 흡연율이 높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여자는 물론이고 아이들도 거리낌 없이 [[담배]]를 피웠다. 여성 흡연이 터부시되기 시작한 것은 서양 문화의 영향때문이었다.] 하지만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는, 선배 상궁 앞에 돌아앉아서 선배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하늘에 별이 보일 때까지 계속 담배를 피우는 힘든 시험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나인들은 선배 상궁들과도 맞담배질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15세기 [[경원대군|명종]] 시대 궁중의 모습을 보면 노란 치마를 입은 여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노란 치마는 19세기까지 등장하는데, 궁녀의 옷으로 알려진 파란 치마보다 노란 치마가 더 흔히 보일 정도다. 18세기 《[[영조]]-[[정순왕후 김씨(조선)|정순왕후]] 가례도감 의궤》를 보면 기행나인, 보행나인, 시녀라고 적힌 이들이 있으며 상궁은 녹색 원삼을 입고 망사를 쓴 채 말을 타고 있는 여자로 추정된다. 보행나인은 기행나인보다 옷이 간소하고 [[족두리]]로 보이는 예모를 쓰고 있으며 얼굴은 가리지 않는 채 걸어간다. 상궁 뒤에는 향차비라는 예모도 쓰지 않은 맨머리의 여자가 따르고 있다. 비(婢)가 아니기에 비자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때 소매가 넓은 예복을 한 사람들은 모두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류성룡]]이 쓴 《[[징비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선조(조선)|선조]]의 몽진을 수행한 궁인들은 '물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따라갔다'고 한다. 즉 궁녀는 대외활동을 할 때는 얼굴을 가렸다는 해석이 가능하고, [[영조]] 시대 《의궤》를 보면 최소 18세기까지는 궁녀들이 외부에 모습을 드러낼 때 얼굴을 가린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의궤》에는 나인이라 불리지만 얼굴을 가리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데, [[정조(조선)|정조]]의 《[[일성록]]》에는 가례를 앞두고 참례하는 침선비들에게 들이는 비용을 줄이라는 말이 있다. 당시 남녀 내외가 엄격해 사족 부녀라면 외간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내명부 품계를 가진 궁녀들이 또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다. 궁중 침선비는 대략 [[기생|관기]](官妓)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이 보행나인이 내명부 품계가 없는 여자들이라면 나인이라는 명칭의 범위는 흔히들 알려진 것보다 더 넓었을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