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내셔널리즘 (문단 편집) ==== 옹호론 (‘의의가 있다’ 측) ==== >'''"민족주의란 한 국가가 발전하고 한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보물이다."''' >---- >'''[[쑨원]]''' >'''"내 몸이 남의 몸이 될 수 없음과 마찬가지로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 수 없으며, 피와 역사를 같이하는 민족보다 완전한 영원함은 없다."''' >---- >'''[[김구]]''' >'''"민족이란 인간의 육신을 구성하는 장기와도 같다. 민족이 고통에 처했을 때는 마치 우리들 스스로가 고통에 처한 것처럼 노력해야 한다."'''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 이들 가운데 [[쑨원]]이나 [[김구]]의 경우 [[민족주의]]에 가깝고, 아타튀르크의 경우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국민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쑨원의 경우 ([[청나라]]의 [[만주족]]이 아닌) [[한족]]이 권력을 장악해야 중국이 산다고 이야기했을 만큼 강경한 '''한족 내셔널리스트'''였고, 백범 김구 역시 [[백범일지]]를 읽어보면 [[한민족]]의 부흥에 방점을 찍고 있다. 반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경우 "자신을 [[튀르키예인]]이라 믿고 튀르키예의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모든 사람은 튀르키예인"이라 규정했으며, 이러한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튀르키예]]라는 새로운 '민족국가'에 대한 애국·애족심을 심으려 했던 사람이다.] 어느 문화권이든, 어느 국가이건 간에 전통적으로 민족주의는 특정 집단에 동질성을 부여해 발전의 동력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무기로서 찬양되어 왔다. 이는 전통적으로 민족주의 정서가 강력했던 동아시아의 [[한중일]]은 물론, [[아브라함계 종교]]에서 나타나는 [[선민사상]]이나 근세 이후 유럽이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급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역설적으로 제국주의의 피해를 입던 후발 주자들이 독립적인 국가를 형성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선민사상이니 제국주의니 하는 단어만으로는 부정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중국의 [[한족]]이 [[요나라|거란족]], [[금나라|여진족]], [[원나라|몽골족]], [[청나라|만주족]]에게 끊임없이 중원 본토를 빼앗기면서도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 자신들의 민족국가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민족주의가 있었고, [[유대인]]들이 [[홀로코스트]]라는 어두운 시기를 이겨내고 자신들의 국가 [[이스라엘]]을 세울 수 있었던 건 '''우리는 특별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우리가 우월하니 타인에게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차별적 사상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니 우리는 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는 단결력을 불러일으킨 쪽이면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할 만 하다. 더불어 유럽이든 아시아든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 근대 국가로 넘어가는 과정에는 민족의식이 크게 작용했다. 근대 유럽인들이 자신들을 봉건 영주같은 개념이 아니라 공동의 정체성을 가진 특정 민족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단결하여 성장할 수 있었고, 위에서 언급한 [[쑨원]]도 중국이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물어뜯기는 과정에서 중국이 살아남으려면 중국인의 민족의식에 호소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삼민주의]] 역시 그러한 배경에서 등장한 사상이다. 오늘날의 대표적인 강대국인 [[러시아]]와 [[중국]] 모두 실제 단일민족 국가는 아님에도 [[덩샤오핑|성장]][[스탈린|기나]] [[중일전쟁|국난]][[독소전쟁|시에]] [[러시아인]] 민족정서 혹은 [[중화민족]] 같은 민족주의 정서에 호소했던 바 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독립국들 중 급성장을 이루어낸 케이스의 대다수는 [[단일민족국가]]로 민족 중흥의 가치를 강조했던 경우가 많다. 한국의 경우에도 [[구한말]] 조선의 개화파들부터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개발독재기 군사정권과 민주화 세력 모두 [[한민족]]을 강조했다. 물론 이러한 민족주의가 민족을 위해서라는 미명 아래 불합리한 개인의 희생들을 묻는 역효과를 낳기는 하였으나, 더 큰 역사적인 틀에서 본다면 한국인들의 단결을 이끌어내 독립은 물론 오늘날의 발전된 선진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되었음을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내셔널리즘은 내부 구성원들 사이의 동질성을 강조함으로써 결속력을 도모하고 위기 상황에서 하나의 국가 혹은 민족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이러한 위기대 처능력은 바로 내셔널리즘이 처음으로 태동한 [[프랑스 혁명]] 직후의 프랑스에서부터 입증된다. 혁명기의 혼란과 연이은 외침을 겪으며 내셔널리즘의 의식이 고취된 당대의 프랑스인들은 프랑스를 '우리들의 국가'로, 프랑스인들은 '우리네 동포'로 인식하였으며, 이는 자국과 자민족을 여전히 '국왕의 국가'이자 '국왕의 신민' 정도로 여기던 주변국들과 명백히 대비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국가를 향한 애국심과 거기에서 비롯된 전쟁수행에 대한 협력, 반-자발적 징병제 등으로 나타나 [[나폴레옹 제국]]과 [[프랑스군|프랑스 대육군]](La Grand Armée)이 [[대영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후의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등 당대의 열강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패권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내셔널리즘으로서 통합된 국가는 그렇지 않은 국가보다 결속력이 강하다. 내셔널리즘은 공동체 의식만 공유하고 있으면 대단히 넓은 범위의 인간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어버릴 수 있다. 내셔널리즘의 위력으로 인해 혈연에 기초한 [[씨족]]이나 [[부족]], [[귀족]]이나 [[노예]]와 같은 [[계급]] 제도, 종교, 지연 등의 다른 사회적 연결 고리는 분명 상당히 약화하고, 적어도 균질적인 사회가 출현하게 된다. 이렇게 "언어, 종교, 문화, 계층, 거주지가 달라도 우리는 같은 민족(nation)이 아닌가?"라는 의식 덕에 '내부 갈등'은 줄어든다. 이 때문에 내셔널리즘 국가와 내셔널리즘이 없는 국가[* 주로 과거의 왕, 귀족이 지배하던 국가, 영토가 해당한다.]를 비교하면, 후자는 거의 "나라 꼴도 못 갖춘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므로 후발 국가의 지식인들에게는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 같이 힘을 합쳐서 나라를 건설하자."는 내셔널리즘이 그럴 듯하게 보이게 된다. 내셔널리즘이 완성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국가 전체'보다는 씨족, 부족 같은 혈연 집단의 이익이나 왕족이나 귀족 같은 특정 계급의 이익이 '매우 당연하게' 우선시되고 그것이 정당화된다. 19세기 지식인들은 그 대안으로서 '내셔널리즘'을 제시했던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내셔널리즘의 위력을 증명하는 또 다른 대표적인 예시는 바로 [[제2차 세계 대전]] [[동부전선]]의 교전국인 [[소비에트 연방]]이다.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내셔널리즘이나 애국주의적 사고보다는 국경을 초월한 계급 간의 연대를 강조해왔으며[*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표어나 수많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조직 등에서 알 수 있다.], 실제로 소련 초기 러시아의 수많은 역사적 위인들이 공산주의 이념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격하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소전쟁 초기의 암울한 전황 속에서 스탈린이 선택했던 방법은 러시아의 독립과 근대화, [[러시아 원정|조국전쟁]] 등 역사적인 승리의 순간들에 자리하였던 러시아의 영웅들을 부각하고 [[러시아 정교회]]를 재허용하는 등 내셔널리즘 사고에 기초한 것이었다. 조국이 존망의 위기에 처한 극단적인 상황에서 러시아인들의 저항정신을 고취해 끝내 나치를 파멸로 몰고 간 원동력은 결국 허울뿐인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보다는 '''(러시아) 내셔널리즘'''인 셈이다. 또한 내셔널리즘은 약소국이 외세의 압제에 맞설 기회를 제공하는 유용한 수단이기도 하다. 이러한 '''저항적 내셔널리즘'''(혹은 방어적/해방적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침탈을 경험한 피식민국가들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아왔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민족주의(내셔널리즘)[* 일제의 핍박을 주도하는 '일본 민족'의 속박에서 벗어나,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한 "한민족의 나라를 세우자"는 주장.]는, 반대방향[*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의 상당수는 민족주의(내셔널리즘)와 공산주의를 동시에 지향했던 사람도 많다. 일종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에 있는 공산주의[* 일제의 파시즘을 선도하는 '제국주의 부르주아'에 맞서 "노동자의 국가를 세우자"는 주장.]와 함께 항일 저항운동의 핵심 키워드였다. 일제의 [[한국어]] 말살 교육이나 [[창씨개명]] 등에 맞서 [[한민족]]의 얼을 지키자는 운동이 벌어진 것 또한 같은 맥락이었고. 마지막으로 내셔널리즘은 후발 주자가 (열강 구도가 굳어졌던) 근대 이후 국제사회의 판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최후의 카드(Game Changer)였다. 오랫동안 수십, 수백 개의 영방국가로 쪼개져 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독일 제국|통일을]] [[이탈리아 왕국|이루고]] [[국력#s-2.3.1|유럽사회의 열강 클럽]]에 가입할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유럽 사회를 강타한 내셔널리즘의 확산이었는데,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이 보수적·전통적 가치를 중시했던 것과는 별개로, '독일 민족국가'는 귀족계급보다는 소상공인을 비롯한 독일 민중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독일 민중의 내셔널리즘 신화는 수백 년간 주위 열강들에 의해 분열된 채 변방으로 취급받던 국가가 불과 한 세기 만에 [[보오전쟁|유럽에서의]] [[보불전쟁|지위]]를 확고히 하고, 심지어 [[제1차 세계 대전|양차]][[제2차 세계 대전|대전]]에서 전 세계를 상대로 깽판을 벌이고 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유럽]]의 지도 국가로 자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는 동북아시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컨대 [[대한민국]]의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 성장의 저변에는 "지금 내가 조금 희생하더라도 후손들을 위해 더 나은 나라를 물려주겠다"는 국민적인 합의가 있었고, 이는 국가를 개인보다 우선하고 국가의 성공을 개인의 성공과 연결짓는 국가주의·민족주의적 사고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패전 후 [[일본]] 역시 [[야마토 민족]]에 성실·근면과 같은 인위적인 가치들을 부여하며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경제적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았으며,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도 결국은 [[중화민족]]이라는 만들어진 민족에 대한 민족주의적 자긍심이 큰 영향을 미쳤다. 선진국에서 유학한 학자나 지식인, 엘리트들이 이국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1970~80년대 한국이나 오늘날 중국같은 독재 체제 하의 후진국으로 귀환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하던 것 역시 "내 민족" "내 국가"라는 내셔널리스트로서의 [[애국심]]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오늘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의 국가들은 내셔널리즘적인 성향을 어느 정도 갖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자국민들에게 같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지도 단결을 이끌어내지도 못했던 국가들은 대부분 혼란 끝에 [[유고슬라비아|쪼개]][[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지거나]] 부족·지역 이기주의로 제대로 된 비전을 추구하지도 못하는 후진국[* [[아프리카]]의 사례]에 머무르는 실정이다. 반대로 오늘날 강대국으로 꼽히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모두 내셔널리즘 없이는 현재의 위치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단, [[미국]]의 경우 이민자들의 국가라는 다소 다른 정체성을 가지기에 이론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미국인]]들 역시 여타 선진 강대국들과 마찬가지로 자국의 정체성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하며, 단지 "미국 민족"을 정의하는 기준점이 구대륙처럼 인종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가치일 뿐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