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내시 (문단 편집) ==== 고려시대 ==== 보통 사람들이 '내시'라고 하면 왕이 들어오기 전에 "주우상저어언하아 납씨이오오", "즈언하~ 수라를 들이겠사옵니다."라고 소리지르는 늙은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고려시대]]에는 명문가 출신으로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문관들 중에서 선발되었다. 즉, 현대인들이 "내시 = 환관"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고려시대의 내시는 환관이 아니다. 즉 고려시대는 "내시=현대의 비서실"이다. [[고려]]의 내시는 여러 관청기관을 원래 소속으로 하고 국왕에 의해 선발되어 '내시원(內侍院)'에 근무했다. 내시원 근무 신하는 본래 관직명 앞에 '내시(內侍)'를 붙였다. 고려 내시들은 왕의 행차에 동행하는가 하면, 왕명의 초안 작성, 유교 경전의 강의, 왕실재정 관리 전반을 담당했으며, 때로는 국왕을 대신하여 궐 밖의 민정을 살피기도 했다. 현대로 보면 [[청와대]]의 행정관에 대응된다. 내시는 권설직(權設職)[* 임시 관직. [[경국대전]]에는 대군사부, 왕자사부, 왕손교관 등으로 정이되어 있다.]이며 특별 봉급으로 별사미를 받았다. 때문에 고려 내시 관료는 선망 대상이었으며, 내시 출신 중 재상에 오른 자가 무려 22명이었다. 과거 합격자가 아니더라도 실무 능력을 인정받아 내시가 되기도 하고, 의술, 점술, 잡기 등으로 내시에 발탁되기도 했으며, [[무신정권]] 시대에는 무신이 내시가 되기도 했다.[* 무신정변의 주역인 [[이의방]]의 동생이자 [[이성계]]의 6대조인 [[이린]]이 무신정변 이후 내시집주로 재직하였다.] 왕을 보좌하는 직업이기에 무술시험도 봤다. 이후 [[공민왕]] 대에 [[내시부]]가 만들어진 후에는 관료들이 담당하던 내시원은 군 복무 대신으로 하는 궁궐 숙위 성중관(成衆官)으로 역할이 위축되었으며, [[조선]] 초 [[세조(조선)|세조]]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궁궐 숙위의 기능만을 담당했다.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환관이 곧 내시부를 담당했던 [[조선시대]]의 영향 때문에 환관과 내시를 너무 쉽게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고려시대의 내시직은 엄연히 당대의 고위가문 자제들만이나 들어갈 수 있는 엘리트직인데도, 이를 환관으로 착각하곤 한다. 예컨대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내시 [[한뢰]]가 [[정중부]]에게 "개도 안 물어갈 환관 놈"이라고 욕을 먹는 이상한 장면이 나오고[* 다만 이 작품에서 한뢰가 진짜 거세한 환관으로 나오는 건 아니다. 한뢰가 수염을 달고 있는 걸 보면 남성이 상실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여기서 정중부가 한뢰를 두고 환관이라고 욕을 하는 건 모욕감을 주기 위한 욕을 한 것이다.], 오히려 진짜 환관이었던 [[왕광취]]는 멀쩡히 수염 달린 관료로 묘사되어 고증오류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드라마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는 이를 신경쓰려다가 진짜 환관이었던 [[최만생]] 조차 수염을 기른 관료로 묘사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