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르바 (문단 편집) == 조상과 가족 == 네르바의 증조부였던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기원전 36년 집정관)|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네르바 황제와 이름이 같으며, 네르바 황제까지 4대의 이름이 모두 똑같다.](1세)'''는 내전기때 삼두파 중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를 지지한 원로원 귀족이었고, 공화정 시대 말기인 BC 36년도 집정관을 역임했다. 네르바의 조부였던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2세)'''는 뛰어난 법률가로 상당한 명성을 떨쳤던 원로원 의원으로, 젊은 시절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자 후계자였던 [[티베리우스]]의 몇 안 되는 가장 친한 친구로 유명했다. 이런 이유로 네르바의 조부는 친구 티베리우스의 오랜 법률 조언자로 있으면서 티베리우스 시대가 된 이후, 황제의 추천 아래 서기 21년(또는 22년) 7월에 집정관에 올랐다. 네르바(2세)는 집정관에서 물러난 이후 티베리우스 황제가 조카와 아들을 연이어 잃고, 카프레이아(카프리) 섬의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부터 자발적으로 별궁으로 거처를 함께 옮긴 최측근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33년에 카프레이아 섬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네르바의 부친인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3세)''' 역시 원로원 의원으로 있으면서 비텔리우스[* 네로 황제 사후 내전기 동안 제위를 차지한 [[비텔리우스]] 황제의 아버지] 등과 함께 원로원 내 중진 중,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파의 대표적인 인사였다. 이런 연유로 그는 [[칼리굴라]] 황제의 집권 기간 중에 집정관을 지냈다. 네르바의 외가 역시 제정 시대부터 서서히 줄어들던 이탈리아 귀족 집안이었다. 네르바의 외숙모는 [[기사계급]] 출신 가문에서 태어난 '''루벨리아 바사'''였는데, 그녀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손녀딸인 [[율리아 리비아]]가 남편인 [[네로 카이사르]]와 사별한 후 재혼하면서 수양딸로 삼은 여자였다. 한마디로 네르바는 몇 안 되는 공화정 시대로부터 내려온 명문가에 속해 있었던 사람이었고, 본인을 포함해 4대가 모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지지하던 원로원의 대표적인 황제파 정치 가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네르바에게는 '''코케이아'''라는 이름의 동복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네로]] 사후 즉위한 황제들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의 친형이었던 루키우스 살비우스 티티아누스 오토와 결혼했다. 이 결혼에서 코케이아는 네르바의 유일한 조카인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코케이아누스]]'''를 서기 55년에 낳았다. 네르바의 조카 오토 코케이아누스는 [[네 황제의 해]] 내전 동안 황제에 올랐던 숙부 오토가 양자로 입양하길 원할 정도로 매력이 넘치는 아이였다. 외숙부 네르바 역시 외조카를 각별히 신경썼는데, 이런 배경 때문에 오토 코케이아누스는 서기 63년 사제들 중 귀족 청소년들로 구성된 각각 12명씩의 살리 멤버가 되었다. 이후 네르바의 외조카 오토는 서기 82년 집정관까지 취임했다. 그렇지만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그를 의심하고 미워해, 서기 96년 >"반역자인 숙부 오토의 생일을 축하했다." 는 죄목을 씌워 죽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