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르바 (문단 편집) === 즉위와 위기의 고조 === 서기 96년, 네르바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게 될 친혈육인 여동생 코케이아의 아들인 루키우스 살비우스 오토 코케이아누스를 잃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네르바의 외조카인 오토 코케이아누스가 숙부였던 오토 황제의 생일을 기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그를 죽였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해인 96년, 도미티아누스가 [[팔라티노 황궁]] 안의 본인의 침실에서 끔찍하게 암살당했다.('''[[도미티아누스 암살 사건]]''')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자, 네르바는 고령인데다가 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에 의해 황제에 옹립되었다. 자식도 없고 외조카마저 살해되어 후사가 없었던 네르바를 황제로 지목한 것은 조종하기 쉬운 노인을 자리에 앉혀 원로원이 정국을 장악함과 동시에, 도미티아누스에게 혈육을 잃어 그 명분이 명확한 네르바를 상징으로 삼아 플라비우스 왕조의 악행을 부각시키려는 의도 등이 깔려 있었다.[* 도미티아누스가 실각한 것이 아니라 암살당했는데도, 원로원은 사후 도미티아누스를 단죄했다. 원로원을 억압했던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분풀이이기도 했지만, 이는 원로원이 그들 주도하의 정국을 구상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네르바는 그가 재임하는 동안 단죄당하는 원로원 의원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는 하드리아누스의 치세를 제외한 오현제 시대 내내 이어졌다. 하드리아누스는 집권 과정에서 몇몇 반대자들을 숙청했고, 말년에는 매형과 외종손에게 죄를 덮어 씌워 모두 자살하라고 강요했다.][* 여기에는 네르바가 이 해에 친아들처럼 아꼈던 외조카 오토 코케이아누스를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의심 속에 억울하게 잃으면서 얻은 상실감과 그로 인한 다짐도 짙게 깔렸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동시에, 네르바는 사재를 전부 기부해 사심이 없음을 밝혔다. 다만, 이 발언은 사실 반강제적으로 나왔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동시대나 후대의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이야기가 나왔다. 하여 [[디오 카시우스]]는 네르바가 사심 없이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삼고, 사재를 국가에 바쳤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네르바의 친척들이 모두 있어 의문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담담히 적고 있다. 제위 계승이 잡음 없이 순식간에 이루어진 덕분에 내전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군대의 인기가 높았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 자리에 노인이 들어앉은 것에 대해 근위대는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는 네르바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플라비우스 왕조의 세 황제 모두와 긴밀한 사이였고,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는 그에게 속마음도 표현할 정도였다. 네르바는 네로의 몰락과 [[네 황제의 해]] 기간 동안의 무정부 상태를 봤고, 이를 직접 해결했던 사람인 까닭에 몇 시간이라도 주저한다면 폭력적인 내전으로 치닫게 될 것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즉위 직후, 원로원이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기록말살형을 통과시키고, 이를 이행하는 조치를 하는 것에 있어 신중함을 권고했다. 그렇지만 원로원은 도미티아누스의 모든 것을 없애고 싶어했다. 그래서 도미티아누스의 기존 초상화는 모두 신제 네르바의 얼굴로 교체된 뒤 재전시되었다. 이와 함께 원로원 및 황궁 관료 세력은 네르바가 움직이기 전, 팔라티누스 언덕에 세워진 광대한 크기의 '플라비우스 궁전'을 '시민의 집'으로 명칭을 바꿨다. 이렇게 되자,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향수가 강한 [[프라이토리아니]], 로마군, 서민 모두의 불만이 클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살루스트 정원 안에 마련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소유의 옛 별장에 거처를 마련해 살아야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