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르바 (문단 편집) === 강제적인 양자 지명과 붕어 === 군대는 불만을 품고 있었고, 지지 기반이 없는 늙은 황제는 여동생의 손자들이 여럿 있다고 한들 그들을 후계자로 내세울 명분이 없었다. 제위 계승자도 없었고, 황제의 모든 사재 역시 강압적으로 군대에게 압류된 상태였다. 네르바는 고립된 채 원로원의 방패막이 같은 처지가 되었다. 고령의 황제는 온순하고, 원로원에게 굴복된 인상을 남겨, 이를 지켜본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은 원로원에게 휘둘린 네르바와 원로원을 손바닥 위에 놓고 가지고 논 도미티아누스를 비교했다. 이런 여론이 감지되는 가운데, 네르바는 서둘러 근위대장 인사 조치를 단행하여 병사와 대중들로부터 원한을 사고 있었던 티투스 페트로니우스 세쿤두스를 해임하고, 전임자 중 병사들에게서 신망을 얻고 있었던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를 복직시켰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오히려 독이 되었다. 아일리아누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그가 내세운 절대 가치인 >'''법 아래에서의 공평함''' 을 찬양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하들처럼 시해된 도미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을 당한 것이 부당하다고 느꼈고, 오히려 그를 신격화시켜야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일리아누스는 >"네르바와 원로원이 도미티아누스 암살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는 주장을 펼치며,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끌고 수도 로마를 포위했다. 아일리아누스와 프라이토리아니가 내부 쿠데타를 일으켜 폭동을 일으키자, 이를 제어할 세력은 없었다. 원로원은 제 살 길을 마련하겠다며 네르바를 내팽겨쳤고, 네르바는 아일리아누스에게 모든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답을 한 후, 사실상 유폐된 처지가 되었다. 황제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고, 원로원은 네르바에게 책임을 덧씌운 것처럼 행동할 뿐 책임을 지지는 않았다. 네르바의 남은 2~3개월은 결국 군부의 뜻에 따라 좌지우지되었다. 황제가 사실상 유폐되고, 모든 면회가 통제된 상황에서 황제의 이름으로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혐의를 받은 자들이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이 과정에서 네르바는 군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트라야누스]]'''를 반강제적으로 후계자에 지명했고, 프라이토리아니의 명령은 네르바의 반역재판 금지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어 다시금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네르바가 제위에 오른 지 채 2년이 지나기도 전인 서기 98년 1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네르바는 청중들에게 연설하던 중, 고령의 나이와 최근 겪은 스트레스로 고생한 와중에 겪은 후유증 탓에 [[뇌졸중]] 증세를 호소하며 쓰러졌고, 거주 중이었던 살루스트 정원 내 베스파시아누스 별장으로 호송되었다. 며칠 뒤, 네르바는 별장 안에서 사실상 유폐된 채 열병으로 고생하다가 붕어했다. 그후 화장된 유해는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장되었다. 네르바 황제를 마지막으로 아우구스투스 영묘의 묘실이 가득 차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때는 아일리우스 영묘를 새로 건설해 황제 일가의 무덤으로 삼았다.[* 그럼 트라야누스는? → 아예 생전에 자신의 이름이 부여된 포룸에 자신을 위한 신전과 함께 묘까지 미리 지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