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르바 (문단 편집) == 평가 == 재위 기간이 짧았던 탓에 네르바가 이룬 업적은 적다. [[포로 로마노]]에 포룸이 완공되었을 때 당시 황제였던 네르바의 이름이 붙어 '네르바 포룸'이 되었지만, 이는 엄연히 말하면 도미티아누스가 착공을 지시했던 건축물이었다.[* 그에게 기록말살형이 내려졌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서민들의 항의로 도미티아누스 경기장(현재의 나보나 광장)의 이름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애초에 [[오현제]]에 들어간 것 자체가 원로원과 타키투스 등 친 원로원 성향의 역사가들의 미화 때문이었고, 이때문인지 [[나무위키]]에는 오현제 중 가장 늦게 등재되었다. 네르바는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 이외에 한 일이 없다는 비아냥을 받기도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꼭 그렇게 볼 수 없다.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지명했던 결단은 내전 직전까지 몰린 제국을 구해냈다.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그가 취한 관용책과 선제 도미티아누스 시대 동안 발생한 희생자들의 명예회복 조치는 파탄으로 치닫고 있는 정국을 안정시켰다. 이런 공로와 함께, 네르바는 반은 타의였지만, 어쨌든 간에 '''양자 계승의 원칙을 확립했다.''' 다른 왕조들과는 달리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내전 없이 성립되었고, 원로원과의 관계가 대단히 좋은 편이었는데[* 네르바의 제위는 원로원에 의해 정당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기의 원로원은 다른 때에 비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는 네르바의 공이 컸다. 물론, 네르바로서는 반(半) 강제로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를 지명한 상태였고, 그의 양자 지명은 후사가 없는 로마 귀족들의 관습상 늘상 있는 조치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네르바가 제위에 오른 뒤, 보여준 관용적인 대처와 유연함 속의 결단력은 종국적으로 황제와 원로원의 공존을 전제로 한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체제의 안정 속에서 팍스 로마나가 꽃을 피운 힘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친 원로원 성향의 역사가였던 타키투스는 네르바의 치세를 일컬어 황제의 권력과 시민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기라고 호평했다. 여기에서의 시민이란 곧 원로원이었다.[* 역사서를 비롯한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이 원로원 의원 출신으로 대표되는 상류층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나쁜 황제라고 알려진 황제들은 원로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현대의 역사가들은 네르바의 공이 조금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찬사를 보내지는 않는다. 되레 트라야누스의 후계자 지명 자체가 군부가 주동하고, 네르바는 도장만 찍어준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근위대가 네르바를 유폐하고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자들을 처형했을 때 이미 네르바는 실권을 잃었을 거라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말기 ~ [[세베루스 왕조]] 시대까지 활동한 원로원 의원이며 역사가인 [[디오 카시우스]]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네르바의 외종손을 비롯한 남자 혈육들이 여럿 있었다고 말했다. 물론, 디오 카시우스는 트라야누스 대제의 정통성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네르바가 국가를 위해 사심을 빼고, 이탈리아인이 아닌 외국 출신의 로마인을 오로지 그 능력을 믿고, 선택했다며 담담하게 기록해 놓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