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기남 (문단 편집) == 생애 == 부모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12남매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장연(長淵). 15살 나이로 1917년 서울 [[용산예수성심신학교]](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대신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1930년 1월 18일 [[성품성사|사제품을 받았]]으며, 명동성당 보좌신부로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1942년, 한국 가톨릭 사상 첫 한국인 주교로 성성되었다. 당시 일본 식민당국에서는 경성대목구장에 일본인을 앉히기 위해 여러 공작을 펼쳤다고 한다. 이에 노기남 주교의 전임자였던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 주교는 오기선 요셉 신부 등 한국인 사제를 도쿄에 있는 교황대사에게 보내는 등 역공작을 펼쳐, 노기남 신부가 경성대목구장에 오를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노기남 대주교의 주교 서품식 때 [[복사(기독교)|복사]]를 섰던 어린이 가운데 하나가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었다. 노기남 대주교는 정 추기경이 받은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품성사]]의 집전자였고, 2021년 선종한 정 추기경은 용인 성직자묘역 노 대주교의 곁에 안장되었다. 1962년 한국 가톨릭에 교계제도가 설정됨에 따라 서울대목구가 천주교 서울대교구로 개편되었고, 그에 따라 노기남 주교는 대주교가 되었다. 1967년 3월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다. 1959년 프랑스 최고문화훈장에 이어 우리나라와 이탈리아에서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10여 차례 바티칸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육영수 추모사업회에도 참여하였다. 육영수 여사는 노기남 대주교, 김수환 추기경과 각별한 사이였다. 박근혜에게 세례성사를 준 사람이 노기남 대주교였다. 하지만 박근혜는 불교 수계도 받고, 개신교 신학대학원도 다니고, 결국 믿은 건 사이비종교이니, 제대로 된 신자라 볼 수 없다. 그가 기고한 중앙일보 칼럼[[http://pdf.joinsmsn.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197905040023|제64화 명동성당 - (1)「뾰족당집」]]에 의하면 명동성당은 자신의 인생 그 자체라 한다. >이러한 명동성당에서 나는 35년 동안을 살았다. 1930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어 명동성당에서 12년 남짓을 봉직해왔고, 그 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주교 임명을 받아 25년간을 교구장으로서 일해온 곳도 명동성당 구내였다. 모두 37년 동안을 명동성당 구내에서 살아온 셈인데 그 37년은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시기인 것이고, 내 인생은 그곳에서 시작하여 그곳에서 은퇴를 맞이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명동성당이야말로 「내 인생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명동성당과 관련해서 하고싶은 이야기가 참으로 많다. 그 가운데는 이미 세상에 알려진 것도 있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은 남겨두어 다음 세대를 위한 증언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큰 것이다. [[http://pdf.joinsmsn.com/article/pdf_article_prv.asp?id=DY01197905260022|칼럼에 의하면]], [[3.1 운동]] 당시 그를 가르쳤던 [[장면]]은 같이 만세를 부르고 싶어했으나 마찰을 우려한 학교 때문에 결국 못했지만, 대신 3.1 운동은 하늘의 뜻이란 걸 가르쳐주기로 했다 한다. 1967년에 은퇴했지만,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80400209205003&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8-04&officeId=00020&pageNo=5&printNo=18102&publishType=00020|1980년 기사]]에 의하면 나환자를 찾아다니면서 일을 많이 했다. >노 대주교가 현재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일은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오전리에 에 있는 [[https://www.lazarus.or.kr/|성 라자로 마을]]에서 벌이고 있는 [[구라#s-4|구라]] 활동. 구라 사업은 이경재 알렉산데르 신부가 실무를 맡고 있으나 노 대주교가 은퇴 전 서울대교구장으로 있을 때부터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이 마을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임은 물론 주안을 두고 돌보고 있다. >노기남 : 내가 살고 있는 곳의 맞은 편에 100명의 양성 환자가 살고 있어요. 또 마을 입구 정착촌에는 100여 가구, 4~500명이 자활의 꿈을 키워놓고 있지요. 이른바 천형(하늘의 벌)이라는 나병이지만, 그럴수록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적 위안입니다. (중략) 이같은 일 이외에 1주일에 평균 한 번씩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 마포구에 있는 국제한국연구원에 출근한다. 동경한국연구원장(원장 최서면)의 본부로 평소 아들처럼 여기는 최 원장을 돕는 일이라고 말했다. 1984년 5월에는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을 알현하였고, 한국 103위 순교성인 시성식이 거행되는 것도 지켜보았다. 불과 1달만인 같은 해 6월 선종했다. 향년 82세. 경기도 용인시의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의 후임 서울대교구장을 역임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2009년 선종),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2021년 선종)도 그의 곁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