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르만족 (문단 편집) == 역사 == || [[파일:2072BBB3-834E-4C04-8BDE-3084ECF3B9B5.jpg]]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Normannen.png]] || || 노르만의 진출 영역 정리 지도(상)과 [[1130년]] 노르만의 영역(하)[* [[롤로]]가 정복한 그들의 본거지 노르망디와 롤로의 5대손 [[윌리엄 1세]]가 정복한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 노르망디의 귀족 [[로베르 기스카르]]가 정복한 [[시칠리아 왕국|남부 이탈리아]], 그의 아들 [[보에몽 1세|타란토의 보에몽]]이 정복한 [[안티오키아 공국|안티오키아]], 시칠리아 왕국을 통치하던 로베르 기스카르의 후계자들이 잠시 진출한 북아프리카 등이 보인다.] || [[노르드인]]은 8세기부터 인구 증가 추세와 인구부양력 한계의 압박으로 본토 밖 새 정주지를 찾아 남하하였으며, 소위 [[바이킹]]으로 불리면서 [[유럽]] 북부 해안을 공격하였다. 9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들 중 [[롤로]] 일파가 센 강 하구인 [[루앙]]에 기틀을 잡았다.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3세]]는 그들을 제압하는 대신 회유하여 봉토를 주고 루앙 백작으로 삼았으며, 롤로와 그 후손들은 곧 센강 너머 반도지역까지 장악하면서 [[노르망디 공국]]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외부인 노략자에서 현지인 지배자로 탈바꿈하면서 지역 사회와 융화되었다. 프랑스-라틴 문화에 동화되면서 종교적으로는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언어적으로도 차츰 모어인 북게르만어를 쓰지 않고 [[노르만어]]라고 불리는 변형 프랑스어를 새로운 모어로 삼았다. 이들은 프랑스의 군사문화도 적극 수용하였을뿐 아니라, 그대로 현지에 눌러앉아 [[통혼]]도 하였다. 그러나 프랑크식 군사문화를 받아들여서 해양민족 출신답지 않게 완벽하게 기마민족으로 탈바꿈한 이들은 소수정예의 돌격으로 바이킹을 격퇴할 수있는 중세 중장기병술의 선두주자였고 따라서 독보적으로 강력한 단위전투력을 갖췄기에 단지 노르망디의 지배층으로 만족하지 않고 지중해 세계로 원정을 가서 당대의 굵직한 세력들을 상대로 오만가지 싸움을 벌였다. 말이 좋아 진출이고 정복이지 같은 기독교도도 거리낌없이 배신하고 공격하는 등 행패가 지나치게 심해서 사실상 지중해 세계에서는 이들을 무장폭력단체로 간주하고 싫어했다. 심지어 기독교 동서분열로 인해 사이가 갈라진 교황청과 동로마제국도 이민족의 준동때문에 국경이 불안한 틈을 타 영토와 왕위를 노리고 마구잡이로 침략을 해대는 노르만족을 한마음 한 뜻으로 증오했을 정도다. 특히 노르만족이 최종적으로 점거하는데 성공한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는 노르만족의 상륙으로 인해 남이탈리아 고대 항구도시들의 부유한 해양상업 전통이 단절되면서 쇠퇴했다.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탈리아 남부의 빈곤 문제와 마피아 문제의 단초가 되었다. [[1066년]]에는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가 [[노르만 정복|잉글랜드를 점령]]하면서 [[잉글랜드 왕국]]에 [[노르만 왕조]]가 개창되었다. 이는 [[참회왕 에드워드|웨식스 왕조]]의 단절을 틈타 앵글로색슨 영주들이 선출한 [[해럴드 2세]]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계승권을 주장하면서 무력으로 획득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앵글로색슨족]]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였으나, 이를 진압하고 지배를 공고히 하였으며, [[백년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완전히 융합되면서 영국인(english)으로써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이는 백년전쟁 이전에 노르만족들의 고향인 노르망디가 프랑스한테 점령당하면서, 영국에 정착한 노르만족들이 그들의 고향과 연결이 끊어졌던 점도 기여하였다.] 노르만족은 이베리아의 [[레콩키스타]]에도 상당히 기여했다.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 이전부터 굉장히 활발했는데, 1018년 로저 토스니(Roger I of Tosny)[* 그가 속한 토스니 가문은 굉장히 유력한 노르만 가문 중 하나였는데, 그의 아버지 라울 1세는 남이탈리아의 아풀리아를 약탈해 명성을 얻었으며, 그가 이베리아에서 활약하는 동안 그의 아들인 라울 2세가 윌리엄 1세의 노르만 정복에 참여해 영지를 얻었다. 그러나 12세기 이후로는 쇠퇴한 듯 하다. ]가 무슬림의 침략으로부터 바르셀로나를 지키는 데 참여해 그 댓가로 바르셀로나 백작의 딸과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로베르트 크리스핀이나 월터 기파드 같은 노르만 모험가들은 1064년에 교황이 이베리아 반도의 바르바스트로라는 도시에 선포한 십자군에 참여하였고, 로베르트 부르데와 같은 이는 투델라 지역을 정복할 때 공을 세운 것에 대한 보상으로 타라고나 공작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렇게 이베리아 반도의 성전에 참가하는 것이 노르만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늘자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잉글랜드에 정착했던 노르만인들 일부가 다시 이베리아로 떠나 원정을 벌이기도 했다. 1142년 포르투갈의 아폰소 1세가 리스본을 점령하려 했을 때 많은 잉글랜드 출신 노르만이 참가하기도 했으며, 1147년 다시 전투를 벌여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아폰수 1세는 전투에 참가한 노르만인들을 리스본에 정착시켰다. 그 다음 해에는 바르셀로나 백작 라몽 베렝게르 4세가 토르도사 공략을 위해 노르만인 용병들을 초청하기도 했으며, 역시 이 전투 이후에도 그들은 영지를 받았다. 한편 프랑스 본토의 노르만인은, 오랜 기간 노르망디 공작 겸 잉글랜드 왕이었던 노르망디 가문 및 그 후계 가문을 따르면서, 프랑스 북부에서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았다. 이후 노르망디 지역이 프랑스에 완전히 흡수된 이후로는 프랑스인에 점차 동화되어 사실상 사라졌다. [[노르만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시칠리아를 정복했던]] 노르만족은 역시 정주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다시 동방으로 원정을 떠났다. 그러나 실적이 신통치 않아서 객지에서 전사하거나 동로마제국의 라티니콘 부대 또는 바랑인 친위대에 입대하였다. 나머지 잔존 노르만인들은 기독교도와 무슬림 간의 유혈충돌과 강대국의 침략에 시달리다 홀연히 사라졌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노르만들은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듯~~ [[십자군]] 원정에 빠졌다. 그들은 [[안티오키아]] 근처를 점령하고 [[동로마 제국]]이나 [[사라센]]과 싸웠다. [[킹덤 오브 헤븐]]에서 묘사된 것처럼 성지에 가려면 보통 이탈리아 남부를 경유했는데, 전투민족이었던 이들 노르만인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의 아랍인들을 몰아내는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으며, 최종적으로는 이탈리아에 동화되었다. 또한, 이베리아 반도의 [[레콩키스타]]에도 상당수 가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