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르웨이/역사 (문단 편집) == 근대 == 1814년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노르웨이는 [[스웨덴]]에 합병되었다. 2월 11일 노르웨이는 스웨덴에 독립을 선포했으나 스웨덴 왕세자 [[칼 14세 요한|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의 공격을 받고 무너졌다. 이후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이라는 이름의 [[동군연합]]으로서 어느 정도 자치 상태에 놓였다. 예를 들면 노르웨이는 의회, 군사, 화폐가 전부 스웨덴에서 독립적이었다. 그러나 외교권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스웨덴의 보호무역 정책으로 많은 손해를 보았다. 결국 양국간의 갈등이 심해지다가 1905년 6월 7일 스웨덴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11월, 국민투표로 왕정으로 국체를 정하고 덴마크의 칼 왕자를 노르웨이로 데려와 노르웨이의 국왕 [[호콘 7세]][* 아내가 영국 [[에드워드 7세]]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사이의 막내딸 [[모드 샬럿 메리 빅토리아|모드]]다.]로 추대했다.[* 당시 왕정론과 공화론이 팽팽하게 대립했는데, 만일 노르웨이가 공화국이 되었더라면 [[프리드쇼프 난센]]이 초대 대통령이나 총리가 되었으리라는 설이 유력하다. 다만 난센 본인은 왕정론자였다. 오늘날 노르웨이가 왕정국가임에도 왕실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약한 데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전쟁의 위기에 빠졌지만 호콘 7세가 [[칼 15세]]의 손자여서 스웨덴이 전쟁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국제 정치가 국왕들 간의 혈연관계로 가볍게 해결될 수 있었다면 국왕들끼리 서로 사촌 간이었던 [[러시아 제국]], [[대영제국]], [[독일 제국]]의 [[제1차 세계 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노르웨이인]]들은 99.5%가 독립에 찬성할 정도로 독립열기가 뜨거웠고 [[스웨덴인]]들도 노르웨이와의 동질감이 없었기에 대부분 독립을 찬성했다. 특히 평화주의를 주장하고 국왕 [[오스카르 2세]]를 적대시했던 스웨덴의 사회주의자들이 노르웨이를 독립시켜 줄 것을 주장했다. 영국이 북대서양에서의 패권을 위해 노르웨이의 독립을 도운 면도 있었다. 그 후에는 중립국으로서 [[제1차 세계 대전]]을 넘겼다. 1940년 4월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던 중 독일군이 덴마크를 점령하자 스웨덴은 나치의 점령을 피하기 위해서 노르웨이로 가는 열차 길목을 나치에 제공했고 노르웨이는 점령되었다.[* 이때도 중립을 지키려 했는데 [[윈스턴 처칠]]이 연합국의 편을 들지 않으면 적과 같다고 엄포를 놔서 [[노르웨이]] 주재 [[영국]] 대사가 노르웨이를 [[나치]] 편으로 만들려고 발악하냐고 흥분한 적도 있다. 영국이 노르웨이 침공 준비를 하는 중에 [[나치]]가 먼저 노르웨이로 쳐들어와서 노르웨이는 결국 영국 편을 들게 된다. 사망자 수는 적었지만 [[노르웨이군]]은 열악한 무장으로 저항하여 [[나치 독일군]] 순양함이 격침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저항할 새도 없이 나치에 순식간에 점령당한다. 독일은 노르웨이 점령 이후 전사자 추모비를 노르웨이에 설치했다. 나중에 노르웨이 정부가 이것을 전부 부숴버렸다.] 이때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가 세워지고 [[비드쿤 크비슬링]]이 [[크비슬링 정권|노르웨이 국민 정부]]를 설립해서 독일 점령하 노르웨이 내의 자치 정부의 수반을 자처했으나 실제로 통치력을 행사하지는 않고 [[나치]]가 통치하였다. 나치가 패망하고 독립한 노르웨이 정부는 크비슬링을 총살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영어로 quisling(퀴즐링)은 조국의 배신자, 침략자의 앞잡이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세계대전에서는 독일이 20만이나 되는 군대를 노르웨이에 배치하다보니 저항군 활동이 미미했지만 [[노르웨이 중수 사건]] 같은일도 있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40px-Nasjonal_Samling_insignia.svg.png]] || || 당시 크비슬링이 만든 정당인 [[국민연합(노르웨이)|국민연합]]의 로고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01III-Moebius-029-12%2C_Norwegen%2C_Besuch_Himmler%2C_Terboven_und_Quisling.jpg|width=300]] || || 사진 맨 왼쪽이 크비슬링이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