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르웨이/역사 (문단 편집) == 중세 == [[파일:external/img01.deviantart.net/norwayball_by_thedarkchaosdragon-d85trsd.png]] [[바이킹]]계 민족인 노르드인이 세운 국가로서 노르웨이(Norway)라는 국명도 고대 노르드어로 '북쪽의 길'(Norðvegr)을 의미한다. 872년에 '''[[하랄 1세 하르파그리]]'''에 의해 통일 국가인 노르드 왕국이 건설되었다.[* 주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 비하면 인정받는 통일 왕국의 등장이 조금 빠른 편이다.] 그러나 하랄 1세의 즉위 이후 그의 통치, 특히 토지세 징수를 거부하는 일파가 스코틀랜드 인근의 [[오크니 제도]], [[셰틀랜드 제도]], [[헤브라디스 제도]], [[페로 제도]] 등지로 떠났고, 처음으로 발견된 [[아이슬란드]]도 이 시기에 본격적인 정착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랄 1세는 노르웨이 전역을 지배한 최초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질적인 지배력은 노르웨이의 서부 해안 일대에만 머물렀고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는 명목상 권위만 인정받고 간접적으로 지배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랄 1세는 말년에 아들들 사이의 분쟁에 시달려야 하는 데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는 다른 형제 2명을 살해하였고 AD 948년 하랄 1세가 승하하자 노르웨이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지나친 강권 정치 때문에 '피의 도끼'(Blodøks)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기 때문에 노르웨이 귀족들의 반발이 심해졌고, 결국 반대 귀족세력들이 에이리크 1세를 몰아낸 후 그의 막내 동생으로 잉글랜드에 머물고 있었던 호콘 1세를 귀국시켜 왕으로 옹립했다. 이에 에이리크 1세는 노르웨이에서 추방되었고 AD 948년 바이킹의 일파인 데인족이 장악한 잉글랜드의 노섬브리아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잉글랜드 왕 에드래드의 공격을 받아 도망쳐야 했다. AD 952년 다시 노섬브리아의 데인족의 요청에 따라 다시 왕위에 올랐지만 AD 954년 잉글랜드의 에드래드에게 다시 축출당한 후 스테인모어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이후 노섬브리아는 노르웨이 계열의 지배가 종식되고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하랄 1세를 축출하고 노르웨이의 왕이 된 '''호콘 1세'''는 잉글랜드에서 자란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상태였고 이후 노르웨이에 [[잉글랜드]]인 [[선교사]]들을 초청하여 그리스도교 전파를 후원했지만 다른 노르웨이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했다. 그러나 노르웨이 귀족들이 보유하고 있었던 함대를 모두 회수하여 국왕 직할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지방 행정제도를 개편하여 노르웨이가 본격적인 통합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이 때문에 호콘 1세는 '선량왕-(den gode)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노르웨이 역사상 뛰어난 군주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덴마크에 피신해 있었던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의 아들인 [[하랄 2세 그레이클록|하랄 2세]]가 덴마크 왕 [[하랄 1세 블로탄]]의 지원을 받아 [* 에이리크 1세가 하랄 1세의 누이인 건힐다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형제들과 함께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AD 961년 노르웨이의 남서쪽에 있는 피티아르 섬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피티아르 섬 전투''') 이후 하랄 1세 블로탄은 에이리크 1세의 아들 중 장남인 하랄 에리크손을 노르웨이 왕 '''하랄 2세'''로 즉위시키고 노르웨이를 덴마크의 속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왕이 된 하랄 2세의 실질적인 통치력은 노르웨이의 서부 지역 일대에만 머물러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하랄 2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오슬로의 지방 영주인 트뤼그비 울라프손과 구드라드 비아른손, 그리고 라데 백작(Jarl of Lade)인 시구르드 호콘손을 살해하고 전통 신앙 숭배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에서 하랄 2세에 대한 반감이 퍼져 나갔고, 덴마크 왕 [[하랄 1세 블로탄]] 역시 하랄 2세가 덴마크의 종주권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아닌 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하랄 2세에게 살해당한 시구르드 호콘손의 아들인 새로운 라데 백작 '''호콘 시구르드손'''이 AD 970년 하랄 1세 블로탄의 묵인을 얻어 하랄 2세를 암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노르웨이에서는 덴마크의 지원을 받은 라데 백작 호콘과 하랄 2세의 형제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으나 덴마크의 하랄 1세 블로탄의 지원을 받은 라데 백작 호콘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그리고 '''하랄 1세 블로탄'''은 노르웨이의 남동부를 덴마크의 영토로 합병하여 직접 통치했으나 노르웨이 서부 지역은 라데 백작 호콘을 봉신으로 임명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했다. 이렇게 하여 하랄 1세 블로탄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아우르는 제국을 건설했다. [* 여담으로, 그의 별명인 '블로탄'(푸른 이빨)은 오늘날 근거리 무선 기술 표준인 '블루투스'(Bluetooth)의 어원이 되었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왕위까지 차지한 하랄 1세 블로탄은 이제 [[신성로마제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AD 973년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가 붕어한 후, 그의 아들인 [[오토 2세]]가 즉위하자 이듬해인 AD 974년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하랄 1세 블로탄은 노르웨이의 호콘의 지원까지 받아 호기롭게 독일 국경 너머로 침공했지만 '''다네비르케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하랄 1세 블로탄은 [[유틀란트 반도]]를 상실한 채 덴마크령 노르웨이로 도망쳐야 했고, 노르웨이 서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도 상실하여 라데 백작 호콘이 실질적인 노르웨이의 군주가 되었다. 비록 하랄 1세 블로탄은 AD 983년 훗날 [[메클렌부르크]]를 지배하게 되는 북방 슬라브계인 오보트리테족과 동맹을 맺고 신성 로마 제국 세력을 몰아내며 유틀란트 반도를 되찾는 데 성공하지만 이듬해 아들인 [[스벤 1세]]의 반란으로 인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한편 덴마크의 [[하랄 1세 블로탄]] 시절에 독립했던 노르웨이는 통치권을 장악한 라데 백작 호콘이 점차 오만하게 굴면서 각지에서 반란이 들끓었고, 결국 AD 995년에 호콘이 부하들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당시 노르웨이가 반란으로 혼란스러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울라프 트뤼그비손[* 노르웨이 왕 하랄 2세에게 살해당했던 트뤼그비 울라프손의 아들로, 데인족의 잉글랜드 침략에서 두각을 드러냈다.]은 노르웨이로 귀국했고, 라데 백작 호콘이 암살당하자 자신의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노르웨이의 왕위를 차지한 후 '''올라프 1세'''로 즉위했다. 그리고 열렬히 그리스도교 포교에 나서 노르웨이 서부 해안 지방과 인근 섬인 [[페로 제도]], 셰틀랜드 제도, [[오크니 제도]] 및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그리스도교]]를 전파했으나 앞선 노르웨이 국왕들과 마찬가지로 울라프 1세도 노르웨이 내륙 지방에 대해서는 거의 통치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그리스도교도 전파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올라프 1세의 가장 큰 위협은 덴마크의 스벤 1세였다. 스벤 1세는 부왕인 하랄 1세 볼로탄 시절의 노르웨이 통치권을 되찾고자 했고 이를 위해 스웨덴 왕 올로프 3세 쇠트코눙 및 호콘의 아들인 라데 백작 에리크 호코나르손과 동맹을 맺었다. AD 1000년 노르웨이의 올라프 1세가 벤드족의 땅인 [[포메른]]을 습격한 후 노르웨이로 되돌아가는 것을 노려 덴마크의 스벤 1세는 스웨덴의 올로프 3세 쇠트코눙 및 라데 백작 에리크 호코나르손과 연합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벌어진 '''스볼데르 전투'''에서 올라프 1세는 11척으로 총 70척을 상대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고 결국 라데 백작 에리크에게 생포되어 바다에 던져졌다. 이후 '''라데 백작 에리크'''가 노르웨이의 통치를 위임받았고 겉으로는 종주권을 덴마크와 스웨덴이 양분했다. 이때 스웨덴의 올로프 3세 쇠트코눙이 노르웨이의 트뢰넬라그를 획득하는 대신에, 덴마크의 '''스벤 1세'''가 노르웨이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AD 1015년, 덴마크에서 [[크누트 대왕]]의 형인 [[하랄 2세]]가 즉위했을 때 노르웨이의 시조였던 [[하랄 1세 하르파그리]]의 후손인 '''[[올라프 2세]]'''가 즉위했다. 그는 가톨릭 세례를 받은 뒤 노르웨이로 돌아와 AD 1016년 노르웨이 서부를 넘어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했다. 그뒤 스웨덴의 올로프 3세 쇠트코눙과 전쟁을 벌였는데, 그 이유는 올라프 2세가 올로프 3세 쇠트코눙의 왕녀인 잉리드와의 결혼을 청했으나 울라프 3세 쇠트코눙은 잉리드를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프 1세]]와 결혼시켰기 때문이었다. 이에 전쟁이 임박해지자 AD 1019년 스웨덴의 올로프 3세 쇠트코눙은 노르웨이의 올라프 2세와 화해하고 다른 왕녀인 아스트리드를 결혼시켰다. AD 1022년 스웨덴 왕 울로프 쇠트코눙이 승하하고 그의 아들인 아눈드 3세 야코브가 새로운 스웨덴의 왕이 되었다. 본래 이름은 '야코브'였으나 나중에 스칸디나비아적인 이름인 '아눈드'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아눈드 3세 야코브는 부왕 울라프 3세 쇠트코눙과 마찬가지로 처남이었던 노르웨이의 올라프 2세와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노르웨이의 올라프 2세의 지원을 받은 아눈드 3세 야코브가 덴마크까지 위협하기 시작하자 덴마크의 섭정이었던 울프 야를이 AD 1026년 반란을 일으켜 '''[[크누트 대왕]]'''의 어린 아들인 하레크누드를 왕위에 올리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다시 덴마크로 돌아온 크누트가 울프 야를을 제압했고 같은 해 벌어진 스웨덴-노르웨이 함대를 상대로 벌인 '''헬게 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AD 1028년 노르웨이의 지주들을 매수하여 노르웨이 왕인 올라프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후 노르웨이 왕위까지 차지했다. 이리하여 노르웨이 왕위는 크누트에게 돌아갔고, '''북해 제국'''이 탄생했다. 이후 크누트는 흘라티르의 에리크의 아들인 호콘 에릭손을 노르웨이의 섭정으로 삼았으나 호콘이 AD 1030년 사망했기 때문에 크누트의 첫 번째 왕후였던 앨프지푸에게서 낳은 아들인 '''스벤 크누트손'''을 노르웨이의 왕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 키예프 루시로 망명을 떠난 올라프 2세가 스웨덴 왕 아눈드 3세 야코브의 지원을 받아 노르웨이의 회복을 노렸지만 '''스티클레스타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 그러나 올라프 2세는 노르웨이에 그리스도교를 널리 전파시킨 공을 인정받아 성인으로 추증되었을 정도로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여전히 많은 신망을 얻었고, 이 덕분에 키예프 루시에 망명해 있었던 그의 아들 망누스 1세가 나중에 재기에 성공하게 되었다. [[크누트 대왕]] 사후 덴마크의 왕위를 계승한 적자 '''[[하레크누드]]'''가 크누트 대왕의 전처 앨프지푸의 서자 중 한 명인 [[해럴드 1세]]에게 잉글랜드를 섭정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빼았기자, 이 틈을 탄 [[올라프 2세]]의 아들 '''[[망누스 1세]]'''가 아눈드 3세 야코브의 도움으로 스벤을 내쫒고 노르웨이 왕위에 복귀했다. 자세한 사정을 들여다보면 노르웨이의 왕이 된 망누스 1세는 본래 노르웨이 왕 올라프 2세와 잉글랜드 노예인 알프힐드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였다. 망누스 1세가 4살에 불과한 어린 나이였을 때 올라프 2세는 크누트에게 폐위당하여 스웨덴 왕 아눈드 3세 야코브의 도움을 받아 키예프 루시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이후 망누스 1세는 키예프 루시에서 성장했으나 AD 1035년 크누트가 승하하고 그의 아들인 스벤 크누트손이 노르웨이 왕위를 상속받게 되자 그의 지배를 원치 않았던 노르웨이 귀족인 아이나르 탐바르스켈피르와 칼프르 아르네손이 망누스 1세를 왕으로 옹립하고자 했다. 11살의 망누스 1세가 이를 위해 스웨덴으로 향했고, 망누스 1세의 아버지인 올라프 2세를 지원했던 스웨덴 왕 아눈드 3세 야코브로부터 이번에도 도움을 받아 노르웨이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한편 스벤이 노르웨이에서 쫓겨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자, 하레크누드가 노르웨이를 다시 합병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였으나 AD 1039년까지 결판이 나지 않았다. 이에 덴마크의 하레크누드와 노르웨이의 망누스 1세는 서로 협상하여 둘 중 더 오래 사는 사람이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위를 모두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AD 1040년 잉글랜드의 해럴드 1세가 급사하자 하레크누드가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기 위해 떠났으나 AD 1042년 하레크누드도 잉글랜드에서 승하하고 말았다. 이후 잉글랜드의 왕위는 하레크누드와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이자 [[애설레드 2세]]의 아들인 [[참회왕 에드워드]]가 이어받아 앵글로-색슨 왕조를 부활시켰고, 덴마크의 왕위는 하레크누드와의 사전 약속에 따라 노르웨이 왕 망누스 1세의 차지가 되었다. 이후 망누스 1세는 크누트 대왕의 누이 동생인 [[에스트리드 스벤스다테르]]와 [[울프 야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울프 야를이 반란에 실패하여 크누트에게 살해당한 이후 스웨덴으로 망명을 떠나 있었던 스벤 에스트리드센을 귀국시켜 덴마크의 부왕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북해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망누스 1세가 잉글랜드 왕위도 요구하고 나섰으나 포메라니아의 벤드족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스벤 2세 에스트리드센]]이 덴마크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반란을 일으켜 덴마크의 왕위에 오르면서 더이상 잉글랜드에 신경쓸 수 없게 되었다. 망누스 1세는 스벤 2세를 연이어 격파하고 스웨덴으로 쫓아냈으나, 동로마 제국에서 용병으로 활약한 망누스 1세의 숙부인 하랄 시구르손이 AD 1045년 노르웨이로 귀국하여 노르웨이 동부 지역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스벤 2세와 연대를 도모했다. 이에 망누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하랄 시구르손을 노르웨이의 공동왕 '''[[하랄 3세]]'''로 인정해야만 했다. 이때부터 노르웨이는 공동왕 즉위가 관행이 되었다. 그리고 망누스 1세가 다시 덴마크 공격에 나섰지만 AD 1047년 갑자기 승하하고 말았다. 망누스 1세가 승하하자 노르웨이의 왕위는 하랄 3세가, 덴마크의 왕위는 스벤 에스트리드센이 [[스벤 2세 에스트리드센]]이 되어 각각 차지하게 되었지만 이후로도 노르웨이와 덴마크 간의 전쟁은 15년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사이 스웨덴에서도 AD 1050년경 아눈드 3세 야코브가 승하하고 그의 이복형인 에문드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에문드 2세는 선왕인 아눈드 3세 야코브보다도 나이가 많아 '노왕'이라 불렸고, 더욱이 그의 아들인 아눈드 에문드손이 요절한 후 에문드 2세도 재위 10년만인 AD 1060년에 승하하면서 문쇠 왕조가 단절되고 말았다. 이제 스웨덴은 에문드 2세의 사위인 스텐킬에 의한 스텐킬 왕조가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내정 정비 때문에 노르웨이와 덴마크 간의 전쟁에 개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노르웨이와 덴마크 간의 전쟁은 덴마크의 스벤 2세가 노르웨이의 하랄 3세에게 패배를 거듭했지만 하랄 3세가 약탈에만 몰두하면서 덴마크를 끝내 정복하지 못했다. 결국 AD 1062년 '''니즈 전투'''를 끝으로 둘은 상대방을 각국의 군주로 인정했고 AD 1064년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하랄 3세가 승하한 이후 그의 두 아들인 '''올라프 3세'''와 '''망누스 2세'''가 노르웨이의 공동왕이 되었으나 AD 1069년 망누스 2세가 승하하면서 올라프 3세가 단독 왕이 되었다. 올라프 3세가 덴마크 정복을 포기하고 AD 1068년 덴마크와 평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노르웨이는 향후 25년간의 평화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또한 올라프 3세는 함부르크-브레멘 대주교인 아달베르트와 평화조약을 맺고 노르웨이 교회를 직접적으로 통제했으며 노르웨이에 4개의 주교구를 창설했다. 그리고 AD 1073년 올라프 3세가 승하하면서 그의 아들인 '''망누스 3세'''가 사촌인 호콘과 함께 공동왕이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호콘이 승하하면서 망누스 3세가 단독 왕이 되었다. 망누스 3세는 부왕 올라프 3세와 달리 적극적인 대외 팽창정책을 펼쳐 AD 1098년 브리튼 섬 근처의 섬들인 헤브리디스 제도와 맨 섬을 원정하여 이들의 왕이 되었고, 같은해 잉글랜드를 정복한 노르만족의 공격을 막아달라는 웨일스인들의 요청에 따라 웨일스 북서부의 앵글시로 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스웨덴도 공격했으나 곧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AD 1101년 스웨덴 왕 잉에의 딸인 마르그레테와 결혼했다. 그리고 AD 1102년 아일랜드 섬을 정복하고 더블린의 왕위에도 올랐지만 AD 1103년 아일랜드에서 식량을 징발하던 중 살해당하고 말았다. AD 1103년 망누스 3세가 승하하자 그의 아들들인 '''에위스테인 1세''', '''시구르 1세''', '''올라프 4세'''가 공동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올라프 4세의 나이가 너무 어려 실질적으로는 에위스테인 1세와 시구르 1세가 노르웨이를 통치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AD 1096년 제1차 십자군 운동이 시작되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동지중해의 레반트에 십자군 국가를 수립했는데 시구르 1세도 십자군 원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시구르 1세는 노르웨이의 통치를 형제인 에위스테인 1세에게 맡겨 둔채 AD 1108년, 60척의 갤리선에 5,000명을 태우고 성지 예루살렘을 목표로 하는 긴 항해를 시작했다. 시구르 1세는 잉글랜드, 프랑스,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지중해로 들어갔고 발레아레스 제도 부근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한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 해적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후 시구르 1세는 시칠리아 섬에 도착하여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던 노르만계 [[오트빌 가문|오트빌(아우타빌라) 왕가]]의 수장인 [[루지에로 2세]]를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해 준 다음 AD 1110년에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여 예루살렘 왕인 [[보두앵 1세]]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시구르 1세는 보두앵 1세를 도와 베네치아 함대와 함께 북부의 항구도시인 [[시돈]]을 함락시킨 후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여 [[콤네노스 왕조]]의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 1세]]로부터도 환영을 받았다. 잠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물던 시구르 1세는 자신의 함대를 모두 매각하여 그 돈으로 대신 말을 구입했고, 동로마 제국에 용병으로 남기를 원하는 부하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이끌고 육로를 이용하여, AD 1111년에 노르웨이로 귀국하면서 무려 3년에 걸친 대장정을 마쳤다. 노르웨이는 하랄 3세 이후 공동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관행이 만들어졌고 시구르 1세 역시 형제인 에위스테인 1세 및 올라프 4세와 공동으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올라프 4세가 AD 1115년에 요절하고 에위스테인 1세 역시 AD 1122년에 승하하면서 시구르 1세가 단독 통치자가 되었다. 시구르 1세에게는 아들 망누스 4세 뿐이었기 때문에 공동 왕위 계승이 사라지는 듯 했지만 AD 1128년 아일랜드에서 자신이 망누스 3세의 아들로서 시구르 1세의 이복동생임을 주장하는 하랄 4세가 나타났다. 이에 시구르 1세는 중세식 재판 방법인 <시죄법>을 실시했고, 하랄 4세가 뜨거운 쟁기 보습 위를 걷는 신판을 통과하여 자신이 망누스 3세의 아들임을 증명했다. 하랄 4세가 <시죄법>까지 통과하자 시구르 1세도 어쩔 수 없이 하랄 4세를 자신의 이복동생으로 인정해야 했으나 그 대신 자신과 자신의 아들인 망누스 4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하지만 막상 AD 1130년에 시구르 1세가 승하하자 '''하랄 4세'''는 약속을 파기하고 노르웨이의 왕위를 요구하고 나섰으며, 결국 '''망누스 4세'''와 노르웨이를 양분하여 각각의 왕으로 즉위했다. 처음 4년 간은 불안한 평화가 이어졌지만 결국 AD 1134년에 하랄 4세와 망누스 4세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렇게 하여 노르웨이는 AD 1240년까지 무려 110여년 동안이나 이어지는 가나긴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