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사모 (문단 편집) == 행보 == [[파일:external/www.ohmynews.com/020331_kws_minjoo29.jpg]]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노사모는 적극적인 선거 유세를 벌여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을 이끌어냈다. 노무현은 민주당 내에서 [[동교동계]]에 밀려 비주류의 위치였기 때문에 후보가 된 후에도 당내 지지를 얻지 못하고 흔들렸으며 급기야 대선 직전에는 [[후보 단일화 협의회]](후단협)이 만들어져 [[정몽준]]으로의 후보 단일화는 요구하는 의원들이 집단으로 탈당하거나 항명하기도 했다. 노사모는 단순히 열정적인 선거 유세나 지원에서 끝나지 않고 당 외곽의 거대 정치 조직으로 양적인 성장을 이루며 노무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이 때 노사모에서 주축으로 활약했던 인물이 바로 [[이상호(1965)|이상호]]로, 노사모 국민경선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인터넷 필명은 '미키루크'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당선된 뒤 [[열린우리당]] 창당에 가담했고 전국청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온라인 상에서는 웹사이트 [[서프라이즈]], [[나우누리]] 열린광장 등지에서 이들의 선거활동이 이루어졌고 오프라인에서는 대규모 거리유세와 희망저금통 모금 등이 있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유시민]], [[김원웅]] 등을 중심으로 [[개혁국민정당]]이라는 별도의 신당을 만들어 노무현을 지원하기도 했다.[* 개혁당의 창당은 노무현의 권유였다고 한다. 2002년 여름, [[유시민]]과 인터뷰를 하던 중 노무현이 "유 작가가 구명보트(개혁국민정당)을 준비해주세요. 이 배(새천년민주당)가 난파선이 됐을 때 올라갈 수 있는 구명보트가 하나는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라고 민주당 외곽에서의 세력화를 제의했다고.]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노무현과 정몽준의 후보 단일화]]에서는 적극적인 유세와 지원으로 노무현을 단일 후보로 만들었으며 투표 전날 정몽준이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 투표 당일 전화와 문자를 돌리며 젊은 층들의 투표 참여를 이끌어냈다.[* 대선 당일 무려 '''2000만통'''의 전화가 발/수신됐다. 이는 [[KT]] 창립 이래 가장 많은 량의 전화가 발/수신 된거였다고 한다. 당시 노무현 캠프 기획본부장이었던 [[이해찬]]이 국무총리 시절 KT 사장과 오찬을 하다가 전해들은 얘기라고.] 하지만 자발적이고 건전한 정치 활동 집단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던 노사모가 부정적인 집단으로 변모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정확히는 2002년 대선 이후 노사모 해체에 대한 찬반 토론이 있었다. 해체파는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상황에서 노사모가 존속하면 한 자리 해보겠다는 작자들로 인해 노사모가 오염될 것이라는 우려와 이익 집단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으니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존속파는 대통령에 대한 지지 세력의 필요성과 새로운 정치인 발굴에 노사모가 기여할 수 있다는 얘기로 맞섰다. 결국 노사모는 존속을 선택하고 해체파는 이에 반발해 탈퇴했다.[* 원래 노사모는 회원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2002년 초까지만 해도 5000명 정도에 불과하던 회원 수가 2002년 대선 바람을 타고 십만 단위로 늘어난 것이다. 해체파들의 대부분은 초기부터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정치 욕심이 없었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뒤 노사모 회원들은 [[열린우리당]] 창당에 가담하였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대통령 탄핵 소추]] 당시에는 광화문에서 촛불집회를 주도했다. 노사모 회원이었던 [[이창동]] 감독은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입각했고, 노사모 대표였던 노혜경 씨는 국정홍보비서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게다가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 확보로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면서 친노세력이 더욱 확장되었고, 노사모의 활동도 이 때까지 절정을 이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임기말에 [[열린우리당]]과 노 전 대통령의 관계가 점점 험악해지면서[* 이미 2005년부터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재보선 참패와 대연정 파동 등을 계기로 청와대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는데([[http://www.hani.co.kr/arti/75270.html|열린우리당 “대통령이 신이냐?”…청와대는 침묵]]),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이 역대급 참패를 기록하면서 노 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관계가 험악해졌다.] 지역주의에 저항을 하는 정치인들을 지지하던 노사모의 지지 대상이 역시 점차 노무현 개인으로 축소되었으며,[* 간단히 아이돌 팬클럽을 생각하면 된다. 주체적으로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판단의 기준을 노무현에게 일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모순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노무현 재임 시 굵직한 사건들에 대한 이들의 논조를 노 전 대통령이 이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전제에서 판단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와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이 옳다고 믿는 바의 차이다.] 당시 [[정동영]]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던 [[열린우리당]]과의 관계도 틀어져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노사모의 지도부. 대표적으로 밝혀지기로는 [[문성근]], [[명계남]], [[이상호(정치인)|이상호]], [[정청래]] 등이 회원들을 이끌고 정동영의 아래로 들어갔으며, 정동영계는 [[박스떼기]] 같은 정치공작을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2007년에는 참여정부평가포럼의 창립을 주도했다. [[이병완]], [[안희정]], [[명계남]] 등이 실무자로 참여했으며 노무현이 직접 참석해 강연한 적도 있다. 당시 레임덕이 와서 지지도가 바닥이었던 [[참여정부]]의 정치적 위상 회복을 위한 활동이었다. [[https://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205892.html|#]]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제주도 해군 기지 건설 계획, 남상국 자살 사건, [[이라크 전쟁]] 파병 등은 어찌 됐든 노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행보/결정이었고, 저 결정들에 대해 보수/진보(비노계열 등)가 모두 비판을 했었는데도 그때부터 유일하게 노 전 대통령을 두둔하던 건 '''노사모'''였고, 수 년에서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음모론이 판치고 있다. 그 일들은 이미 오래전에 노 전 대통령이 확실히 의견을 피력했었고 결정하거나 발언했었던 일들인데 아직도 노사모나 친노 세력이 계속해서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도 문제다. 원래 노 전 대통령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미국의 압력이니 [[한나라당]]의 압력이니 등. 아직도 [[이명박]] 전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암살했거나 타살했다는 설을 크게 밀고 강요하고 있으니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는 '쟤들은 원래 허구한 날 음모론 미는 애들 아니냐'는 인식까지 붙고 덩달아 진보의 이미지까지 타격을 입는 등 비노계열 진보와의 마찰이 매우 큰 상태다. 오죽하면 비노 진보 계열에서는 [[NLPDR]]이나 [[종북주의자]], [[주체사상파|주사파]]보다 먼저 비판하는 대상이 무조건적인 극렬 [[친노]]들일 정도. 이후, 초기에 비해 지나치게 비대해진 노사모의 구성원들이 각자 비리와 횡령 등에 가담한 일이 벌어지며 구성원들의 도덕 문제가 제기되었다. 특히 2007년 한국을 달구었던 [[바다이야기]] 사업에 연관된 구성원들을 물갈이하며 창립 초기의 이미지를 회복하려 노력하는 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