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섬벌랜드 (문단 편집) == 역사 == 노섬벌랜드라는 말은 원래 '험버 강 북쪽 사람들의 고장'이란 뜻이었다. 지금의 지역은 옛 고장의 핵심부에 해당되며 이전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의 국경 지대였다. [[로마 제국]] 점령기에는 지금의 지역 대부분이 [[하드리아누스 방벽]] 이북에 위치했다. 로마 제국이 이 지역을 다스린 것은 하드리아누스 성벽을 넘어 북진해 안토니누스 성벽을 쌓고 점령했던 기간으로 매우 짧았다. 이 당시 지어진 로마 도로인 데레 길 (Dere street)은 코브리지에서 시작해, 채비엇 고개의 서쪽을 차지하는 높은 황야지대를 지나 트리몬티움 (Trimontium, 지금의 스코틀랜드 멜로스 마을)까지 이어졌다. 로마 멸망 후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국경 지대가 형성되면서, 한때 잉글랜드의 어느 지역보다 성이 가장 많이 지어기도 했다. 이당시 지어진 성으로는 애닉 성, 뱀버러 성, 던스탠버러 성, 뉴캐슬 성, 워크워스 성 등이 있다. 서로마의 멸망 이후 근처에 버니시아, 데이라 등 앵글족 소왕국들이 들어섰다가 잉글랜드 [[칠왕국]] 중 하나인 [[노섬브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잉글랜드 통일 이후로는 노섬브리아 백작령이 되었다. 10세기 중반 처음으로 노섬벌랜드라는 용어가 노섬브리아로부터 파생되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복왕 윌리엄]]과 노르만족 지배에 가장 반항적이었던 지역 중 하나로, 윌리엄은 대규모 초토화 작전을 통해 겨우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이후 이 지역의 앵글로색슨계 영주들을 대신하여 노르만 귀족들이 영주로 임명되었다. 14세기 이후 중세 후반기의 수백 년 동안 잉글랜드 북부에서 손꼽히는 귀족 가문인 퍼시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퍼시 가문은 정복왕 윌리엄을 수행한 노르만계 귀족의 후손 가문으로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네빌 가문과 대립하고 [[장미 전쟁]]에서 랭커스터파로 참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튜더 왕조 성립 이후에는 여러 반란에 연루되어 숙청되는 등, 그 세력이 줄어들었지만 가문 자체는 방계로 이어져 현재까지 노섬벌랜드 공작위를 가지고 있다. 로마 말기부터 스튜어트 왕조 성립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세력 사이의 수많은 전쟁에서 각축장이 되었다. 노섬벌랜드의 영주들은 물론이고 스코틀랜드 왕들 중에서도 이곳에서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힌 이들이 나왔을 정도이다. 스코틀랜드에서의 잦은 약탈로 치안이 불안한 경우도 많았다. 이 문제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이 된 뒤에야 그나마 개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 내전]] 당시에는 참전한 스코틀랜드군으로 인해 다시 전장이 되기도 했다. [[자코바이트]] 반란에서 반란군에 가담한 [[젠트리]]들도 많았다. 석탄 및 여러 금속 자원이 매장되어 로마 시대부터 활용된 바 있으며, 산업혁명 시기 이후로는 뉴캐슬을 중심으로 공업이 잘전하기도 했다. [[뉴캐슬]]은 노섬벌랜드에 속했다가 1400년경 뉴캐슬어펀타인이 독립주가 되면서 분리됐다. 튜더 시대에는 주변 지역의 병합을 통한 대규모 확장이 이뤄졌는데, 1482년에는 베릭어폰트위드를, 1495년에는 타인데일을, 1536년에는 타인머스를, 1542년경에는 리더스데일을, 1572년에는 헥셤셔를 편입했다. 1844년에는 아일랜드셔, 베들링턴셔, 노럼셔 일대가 합병되었다. 1974년에는 1972년 지방정부법 시행에 따라 타인머스와 노스타인사이드 일대 지역이 타인 위어 주로 넘어가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