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숙(삼국지) (문단 편집) == 평가 == 《여몽전》에 따르면 훗날 손권은 육손에게 주유, 노숙, 여몽을 회고하며 평하길, >"공근(주유)은 웅렬(雄烈)하고 담력과 재략이 남들보다 뛰어나 마침내 맹덕을 격파하고 형주를 개척하여, 멀리 그를 잇기 어려웠는데, 그대가 지금 그의 뒤를 잇고 있소. 공근은 예전에 자경(노숙)이 동으로 오기를 기다려, 나에게 오도록 해서 내가 연회에서 얘기를 나누어 보았는데, 곧바로 대략 제왕의 기업에까지 미치었으니, 이것이 한 가지 유쾌한 일이었소. > >후에 [[조조|맹덕]]이 [[유종(삼국지)|유종]]의 세력을 얻을 것을 기회로 막 수십만의 보병과 수병이 함께 (동오로) 내려온다고 과장해 말했소. 내가 널리 여러 장수들을 청해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자문했는데, 먼저 대책을 적절히 말하는 자가 없었고, 자포([[장소(삼국지)|장소]])와 문표([[진송]])에 이르러선 의당 사신을 보내 격문을 받아 영접해야 한다고 같이 말했으나, 자경은 불가하다고 반박하며 나에게 급히 공근을 불러 대임을 맡겨 거꾸로 쳐야한다고 말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유쾌한 일이었소. > >또 그 결정한 계책은 [[장의]]나 [[소진(전국시대)|소진]]을 멀리 넘는 것이었소. 훗날 비록 나에게 [[유비|현덕]](유비)에게 땅을 빌려주라고 권했으나, 이것은 한 가지 단점 일뿐, 그의 두 가지 장점을 훼손하기엔 부족했소. 주공(周公)은 한사람에게서 완비함을 구하지 않았으니, 그래서 내가 그 단점을 잊고 장점을 귀히 여겼고, 항상 (노숙을) 지금의 [[등우]](鄧禹)[* [[후한]] [[광무제]]를 도와 후한 창업을 도운 인물.]에 비견했소. > >또 자명(여몽)이 젊을 때, 나는 (그가) 아주 힘든 일도 사양치 않고, 과감하여 담력이 있을 뿐이라 생각했소. 나중에 장성하니 학문은 더욱 열리고 늘어나 지략이 기이한데까지 이르렀으니, 공근에 다음간다고 할 수 있고, 다만 언변의 뛰어남이 (공근에) 미치지 못했을 뿐이오. [[관우]]를 취하는 것을 도모함은 자경보다 나았소. 자경은 나에게 답서를 보내길 제왕이 흥기함에 모두 구제(驅除)함이 있었으니, 관우는 꺼릴 바가 못됩니다라 했는데, 이것은 자경이 안으로는 능히 갖출 수 없었으면서 밖으로 큰소리 친 것일 뿐이며, 나 또한 용서하고 책망하지 않았소. 그러나 그가 군영을 지음에는 둔영에는 실수가 없고, 군령은 금지사항들이 실행되고, 부대 경계에서는 군령을 폐하는 자가 없고, 길에 떨어진 것조차 줍지 않게 했으니, 그의 법 또한 아름다웠소." >---- >여몽전 라고 평했다. 《[[여범]]전》에 주석으로 달린《[[강표]]전》에 따르면 손권이 황제가 된 이후 연회에서 엄준에게 자신이 이전에 노숙을 [[등우]]에 비교하고 여범을 오한에 견주었던 것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엄준]]이 자리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신(臣)은 아직 그 취지를 이해할 수 없는데, 노숙과 여범이 총애를 받는 것은 두터우며, 실질 이상의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손권은 "등우는 [[광무제]]에게 [[한나라|한]]의 대업을 회복시키도록 부하 중에서 처음으로 권해서 제왕의 뜻이 없던 광무제가 황제까지 되었다. 노숙은 능력도 있었던 데다가 노숙이 맨 처음 말했던 나에게 제왕이 되라했던 것이 이루어져 내가 황제까지 되었으니 등우랑 닮은 것이다. 그리고 여범은 비록 사치스러웠지만 충성스럽고 곧고 형(손책) 휘하에서 열심히 일했으니 [[오한]]과 견준 것이다. 그들을 편애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변호하자 엄준이 알겠다고 따른다. '''[[조조]]에게 [[순욱]]이 있고, [[유비]]에게 [[제갈량]]이 있다면, [[손권]]에게는 노숙이 있다. [[주유(삼국지)|주유]]와 함께 [[오(삼국시대)|손오]]의 창업에 가장 많이 기여한 인물.''' 노숙이 [[도독]]이 되어 [[관우]]와 대치하는 등의 [[무관]]의 모습이 조금 나오긴 하지만, 그가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모습은 없는 반면에 촉한와의 외교와 관련된 일에서 주로 활약하기 때문에 문사(文士)의 이미지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노숙은 군무와 관련된 관직에 종사했었고, [[주유(삼국지)|주유]] 사후 도독이 되어 전군을 통솔한 [[문무겸비]]의 장군이다. 자신의 무용을 보여주기 위해 활을 쏘아 [[방패]]를 관통시켜 추격군들을 물러나게 한 일화도 있는데 [[여포]]의 [[원문사극]]이 정확도를 과시한 일화라면 노숙이 방패를 관통시킨 것은 용력을 과시하는 일화라 할 수 있다.[* 화살로 방패를 꿰뚫는 건 웬만한 장력의 활로는 힘들며 그만큼 장력이 강한 강궁을 당겼다는 말이니 그 정도로 노숙의 용력이 굉장했음을 보여준다. 후임인 여몽과 비견할 수 있겠다.] [[엄친아|즉 부자에다가 성품 좋고 활 잘쏘고 외교도 잘하고]] 더불어 [[오(삼국시대)|오]]의 '''[[융중대]]'''를 세운 대전략가. 중국에서는 노숙의 진언을 '''[[천하이분지계|탑상책]]'''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침대 위에서의 계책. 노숙이 손권에게 침대맡에서 진언을 했다는 데에서 유래. [[손권|주군]]을 [[오소리|짐승]]으로 비하한 동맹 세력의 [[관우|대강경파]]를 말로써 제압하는 기개와 언변을 갖춘 대전략가. [[위(삼국시대)|주적]]을 그 누구보다 선명히 알고 대세를 꿰뚫었던 통찰력과 [[촉한|동맹국]]과의 분쟁을 미연에 차단하는 외교적 방침을 설계하는 기획력은 역대 대도독들을 압도했다. 적벽대전의 [[주유(삼국지)|주유]], 번성 공방전의 [[여몽]], 이릉대전의 [[육손]]의 비하면 포스가 조금은 떨어져보인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무릇 한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사전에 전쟁이 발발하지 않게 하면서도 전략적으로 국익을 도모하는 것이 최상책이다.[* 다만 아무래도 화려한 공적에 비하면 노숙의 그 공이 중요하지만 영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일어나지 않게 만들었음을 주장할 때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정황뿐인데, 이는 일어난 일을 수습한 결과물에 비하면 변동성이 크고 입증하기도 어렵다.] '''노숙 병사 후 손오와 촉한 상호간의 이익을 도모할 완충제가 사라지면서 양국은 돌이킬 수 없는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노숙이 제갈량만큼만이라도 더 살았다면, 10여 년만 더 버텼다면 '''삼국의 형세는 거국적으로 완전히 뒤바뀌었을 공산이 크다.'''[* 노숙은 46세에 죽었는데 제갈량만큼만(54세) 살았더라도 몰년이 225년이다. 한참 손오를 상대로 [[조비]]의 [[조비의 남정|파상 공세]]가 이어지고 촉한이 [[이릉대전|이릉의 패배]]를 수습하고 [[칠종칠금|남정]]을 끝냈던 그 시점인 것이다. 노숙이 살아있었다면 촉한이나 손오나 영 난감한 국면을 맞이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을 역으로 뒤집으면 '''노숙이 죽으면서부터 [[삼국]]의 안정적인 균형이 깨진 시발점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지방의 유력 호족들의 힘이 강하여 중앙 정부가 영 힘을 쓰지 못하고 정책의 방향도 [[수성]]~~을 빙자한 현 상태 유지~~에 전력했던 '''손오에서 [[주유(삼국지)|주유]]와 함께 국가의 장기적 전략과 비전을 제시한 마지막 인재라 할 수 있다.'''[* 후대의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이 있으나 야심에 비해 역량과 그릇이 너무 작아 몰락한다.] 노숙 사후 손오는 촉한과의 동맹을 깨고 형주(형남)를 탈취하는 승부수를 던졌으나 강대국 조위을 위에 두고 소국끼리 ~~[[자강두천]]~~ 소모전을 벌이는 자충수로 이어지게 된다. 손오는 촉한과 관계가 회복된 이후에도 이전과 동일하게 [[합비]]도 넘지 못했고 촉한에게 탈취한 형주를 이용해 북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는 큰 나라를 상대하기 위해선 작은 두 나라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노숙의 생각을 뒷받침한다고 할만하다.[* 결국 노숙이 추구했던 양국의 동시 압박은 [[석정 전투]]가 발생한 228년부터 [[제갈량의 북벌|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이 있었던 234년 무렵에나 제대로 기능했다. 그러나 여러 방면으로 활발하게 잘 찔러보다가 [[합비 전투(234년)|하필 234년에 손오가 도로 합비를 공격하다 막히고 촉한은 제갈량이 병사하면서 실패했다.]]] 노숙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고 유비와 [[강동]]의 우호를 주도하여 늘 우위를 점했으며 관우조차 어찌할 수 없는 능력과 권위와 강동의 강경파를 제어할 수 있는 담대함을 가지고 있었다. 무리수가 많이 따르지만 [[번성 공방전|관우의 번성 공략]] 당시 노숙이 살아 있어서 손오의 공격의 방향을 촉한이 아니라 조위로 향했다면 아마도 역사의 흐름도 많이 변했을 거라는 점에서 큰 아쉬움을 가지는 식자들도 많다.[* [[한중 공방전]]에서의 패배로 조조는 군사적 위신과 입지가 꺾여나가 내부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 때문에 위기에 몰렸으며, 관우가 [[번성]]을 칠 때 구원군으로 보낸 [[우금]]과 [[방덕]]의 7군이 수몰되고 관우에 호응한 반란이 대대적으로 일어나자 늘그막에 냉철함을 상실한 조조는 [[서황]], [[은서(삼국지)|은서]], [[주개]] 등도 모자라 굳이 빼올 필요 없었던 [[합비]]의 [[장료]]까지 투입하려 하였다.[* 그리고 조조 본인은 불과 1년 후에 사망할 정도로 나이와 건강 모두 위태로웠다.] 조위에 호응한 손권이 거길 칠 마음이 없어서 그렇지 [[합비 공방전|손권 생전에 합비 방어선이 맞이한 가장 큰 위기였다.]] 게다가 손권이 형남을 빼앗고 합비에 미련을 버렸냐면 그것도 아님을 몇 차례 보여줘서 조위는 아예 합비신성까지 만들어서 오를 맞이할 준비까지 했다.] 정사에서 관우가 보였던 행보를 생각해보자면, 이미 노숙 시기에 [[익양대치]]처럼 전쟁 직전까지 갔던 일도 있었고 관우는 파견된 손권의 관리를 내쫒을 정도로 손오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사실 손권의 말마따나 노숙은 관우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안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익양대치 때 노숙과 관우의 문답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노숙은 관우를 눌러 유손동맹이 흔들리지 않게 할 정도의 권위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단도회에서 노숙이 든 명분이 사실관계 따져보면 억지임에도 관우가 별 말 없이 숙이고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건 관우가 모략과 거리가 먼 솔직담백한 무인이었던 탓도 있지만 친유비파이자 유손동맹을 주도했고 그간 양측의 관계를 꾸준히 제어해 온 노숙이 가진 권위가 그만큼 컸고 이를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때 노숙이 관우에게 한 말은 나름대로 점잖게 말해서 저정도지 질타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너희 옛날에 조조한테 대판 깨지고 길바닥 전전하는거 우리 손권님이 불쌍해서 땅 빌려줬더니 [[통수]]를 쳐? 니들 이 땅 가지고 있어봤자 또 박살날꺼 뻔하니까 당장 다시 뱉어라'라는 식의 상대를 깔고 들어가는 협박 막말이었다. 관우의 괄괄한 성격을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그 자리에서 해코지를 당하거나 참수당할 급의 폭언이였다. 그러나 그런 관우가 잠잠히 듣고 있는것을 보면 노숙이 어떤 권위를 가진 인물이였나를 일깨워 주는 점이다.] 그 권위로 사실관계 무시하고 관우에게 우위를 점했고 형주를 전부 얻지는 못했지만[* 사실 전부 달라는건 억지에 실질적으로 무리한 희망사항에 불과하니까 말이다.] 유비 스스로 얻었지 손오는 기여도 한바 없는 강하, 장사, 계양3군을 얻어냈다. 이 정도면 장차 관우의 [[북벌]]에 발맞춰 합비로 [[북진]]하는 방법으로 유손동맹 파탄 없이 더 큰 물고기를 낚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전쟁으로 양국 국력을 까먹는 일 없이 이끌어나가는 데는 대오 강경파인 관우마저 포용하고 제어하여 갈 수 있었던 능력과 명분이 있던 노숙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익양대치 이후 양국이 [[상수]]를 경계로 땅을 나누어 분쟁을 항구적으로 종결하게 한 것도 촉오가 조위를 놔두고 싸워선 안 된다는 노숙의 심모원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노숙이 죽자 손유 동맹은 대놓고 손오를 경계하여 적대적으로 나가는 관우[* 우금과 방덕이 이끄는 7군을 수몰시키고 [[포로]]를 다수 잡아들이자 양국의 경계에 있던 상관의 쌀을 마음대로 가져가먹었다(...).] VS 겉으로는 호의를 닦으며 호시탐탐 형주 병탄을 노리는 여몽의 관계[* 아예 통수 칠 목적으로 [[미방]]과 내통했다.]로 전개 되었고 결국 '''[[형주 공방전|촉오 두 세력은 형주를 쟁탈하기 위해 서로 충돌함]]과 더불어 [[이릉대전|양국의 존망을 걸고 커다란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득을 본건 [[위(삼국시대)|조위]] 뿐이었다.'''[* 조비가 이릉대전의 그 이득을 살리지 못할 만큼 군사적으로 무능했기에 망정이지 아버지 조조의 군재를 약간만이라도 이어받았으면 거기서 이미 조위가 상쟁하던 촉한과 손오를 모조리 집어삼켰거나 적어도 압도적인 조위가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서 삼국시대를 더 빨리 종결시킬 절호의 상황이 됐을 것이다.] 그렇기에 [[촉빠]]와 [[오빠]], 학자 학도들 가릴 것 없이 '노숙이 10여 년만 더 살았다면'이라고 한탄하는 이들도 있다. 그의 친구인 제갈근이 240년대까지 살았고 노숙과 뜻을 같이해 그의 사후 촉한-손오 동맹을 재건한 제갈량도 234년까지는 살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너무 일찍 세상을 뜬 감이 없지 않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