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스트라다무스 (문단 편집) == 생애 == 그의 조상은 원래 [[유대인]]이었으나 할아버지 때 [[가톨릭]]으로 개종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민한 미셸은 상업 대신 학문의 길을 택해 15세 때 [[아비뇽]] 대학에 입학했으나 2년 뒤인 1520년에 [[흑사병]]이 돌아 대학이 휴교하자, 8년간 프랑스 전역을 방랑하며 견문을 넓히고 학문을 다듬었다. 이때 약재에 대한 지식을 배워 약종상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후 1529년에 당대의 명문 몽펠리에 대학 의대에 입학했지만 얼마 못 가서 교수들과 반목하다 과거 약종상으로 일한 전적이 있다는 것이 발각되어 퇴학당한다.[* 당시 몽펠리아 대학 의대는 교칙으로 '육체 노동'을 금하고 있었는데 약종상이 그에 해당되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퇴학 문서는 아직까지 몽펠리에 대학에 남아 있다.] 그 뒤 당대의 명의 스칼리제 밑에서 수련을 하면서 앙리에트 당코스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얻었으나, 흑사병 환자들을 치료해 주고 돌아와 보니 아내와 자식들이 흑사병에 걸려 사망해있던 비극을 겪는다. 그 후로 약 10년간의 행적이 묘연한데, 노스트라다무스의 삶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이 기간 동안 신비주의나 점성술과 같은 [[오컬트]]에 정진했다고 묘사된다. 그 후 1546년에 남부 프랑스에 흑사병이 퍼졌을 때 새로운 치료법으로[* 거리에 널브러진 시체 전부 수습해 매장하기, 페스트 환자에게 한번 쓰고 더러워진 붕대는 재활용하지 않고 태워 버리기 등 위생에 신경을 쓴 것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 본인은 이 치료법을 지켜서 환자를 만날 때는 반드시 몸을 씻고 환자를 대했다고 한다. 때문에 노스트라다무스는 당시 흑사병의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것에 의지한 원시적인 대처 방식에 맞선 최초의 임상의로 평가되기도 한다. [[https://www.thedaily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79326|#]] '보건 위생'이란 관념이 없었던 당시를 감안하면 이는 획기적이고 선구적인 것이었다.] 흑사병을 치료하는 데 공헌했고, 1547년부터 살롱드프로방스라는 마을에 안주하며 여기서 안 퐁사르드라는 [[과부]]를 만나 재혼하게 된다. 안에게서 3남 3녀의 자녀들을 얻는다. 1550년경부터 다음 해에 있을 일들을 예언하는 달력([[토정비결]] 비슷한 달력)을 발간하기 시작했고, 이게 잘 맞는다 하여 [[예언가]]로서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1555년에는 그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집'''의 초본을 발간하게 되는데, [[인쇄술]]의 보급, 당시 지식인들 사이의 오컬트 열풍 등을 타고 프랑스 전체로 퍼져나가게 된다. 그러던 중 오컬트 신봉자인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 의해 궁정으로 초청된다. 이후 앙리 2세의 마상 창 시합 도중의 사고사, 앙리 2세와 카트린 사이에서 얻은 아들들이 모두 프랑스 왕이 되지만 모두 요절한다는 예언이 들어맞으며 더욱 유명해진 그의 이름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사람들은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그의 예언서를 뒤져보게 된다. 말년에는 [[통풍(질병)|통풍]]과 [[류머티즘]]으로 고생했으나, 왕비의 총애를 받아 그럭저럭 풍족한 노후를 보내며 62세로 사망했다. 당시 유럽 평균 수명의 약 2배를 더 산 나이니 상당히 장수한 것이다. 1566년 7월 1일 병사하기 전날 밤에 자신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예언한 것이 마지막 예언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