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승환 (문단 편집) == 생애 == [[1927년]] [[경성부]] 용강정(현재의 [[서울특별시|서울]] [[마포구]])에서 태어났다.[* 이 사람 역시 [[박홍섭]] 구청장과 더불어 진정한 [[서울토박이]]였다. 대대로 한성부 서부 용산방 신창계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참고로, 박홍섭 구청장이 태어난 한성부 서부 용산방 옹리하계와 매우 가까운 지역이다.] [[1946년]] [[경기고등학교|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했다가 1952년 육군 하사로 전역하였다.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이던 1958년 초대 [[서울특별시의회]] 시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민주공화당]] [[김현옥]]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김재광]]계에 속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원만]]과 신민당 복수 [[공천]]을 받아 서울특별시 마포구-[[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함께 당선되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김원만과 신민당 복수 공천을 받아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신은 민주공화당 [[박경원(1923)|박경원]]과 동반 당선된 반면 김원만은 낙선하였다.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을 지지하였고, 다음달인 6월 당직 개편에서 정치훈련원장에 임명되었다.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자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1984년 정치규제 해제된 후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봉두완]]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같은 해 신한민주당 부총재에 임명되었다.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가 다시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이 때 계보 보스였던 김재광과 결별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0년까지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91년 4월 [[신민주연합당]]이 창당되면서 최고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7월 [[정대철]], [[이상수]] 등과 함께 정치발전연구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578017|#]]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이 정치발전연구회 소속 정치인 중 일부를 공천 탈락시키자, 이에 반발하여 [[민주당(1991년)|민주당]]을 탈당하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712563|#]] 3년 뒤인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19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에 복당하여 [[마포구]]청장 후보로 출마, 당선되었다. 국회의원 출신이 기초단체장에 출마하는 경우가 드문데다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중진이었기에 화제가 되었는데, 이에 대해 본인은 '''"나를 정치적으로 길러준 마포구민에게 마지막 봉사를 하고 싶다."'''는 말로 출사표를 대신했다.[* 이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4선 국회의원에 여당 대표를 지낸 [[안상수(창원)|안상수]]가 기초단체장인 경상남도 창원시장으로 출마해서 화제거리가 된 일은 있으나 애초에 창원시가 기초단체 치고는 상당히 큰 편인데다 광역시 승격까지 거론되고 있는 곳임을 감안하면 노승환의 사례는 정말 보기 드문 일임에 틀림없다. 다만 마포구의 행정을 책임지는 자리가 바로 마포구청장인만큼, 마포구민에게 마지막 봉사를 하기 위한 행보로는 말 그대로 안성맞춤이었던 셈. 특히 국회부의장까지 지냈을 정도면 국회는 물론이고 중앙정부에도 여기저기 인맥이 탄탄할테니 마포구 행정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원혜영]], [[최성(정치인)|최성]], [[정장선]]의 선배-- 4년 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1998년 지방선거]]에도 출마해 재선에 성공했으며,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2002년 지방선거]] 때는 불출마하면서 스스로 3선을 포기했다. 이후 [[열린우리당]] 고문을 지냈으며 [[대통합민주신당]] 탈당 이후로는 당적을 갖지 않았다. [[2014년]] [[5월 24일]] 숙환으로 별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