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예 (문단 편집) === [[대항해시대]] === || [[파일:attachment/african-slave-trade-11.jpg|width=100%]] || ||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이동표 || 근세 [[식민주의]] 시대에 이르러 [[아프리카]] [[노예무역]]이 세계적인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초기에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선취권을 얻은 [[포르투갈]]이 큰 비중을 차지했으며 후에는 영국을 포함한 후발국가들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당시 노예무역은 가장 많은 이윤이 남는 장사로 통했다. 때문에 노예상인들은 족장과 물물교환을 하는 형식으로 거기에 있던 노예들을 받아내거나,[* 주로 값은 엄청 저렴한데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신기해 보이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유리구슬이나 희한하게 만든 장신구 등이 이에 해당된다.] [[용병]]들을 고용해 아프리카로 가서 눈에 보이는 아프리카 주민들을 무더기로 납치했다. 포르투갈도 아랍과 아프리카 현지 상인들의 방식을 답습했다. [[파일:attachment/Transatlantic-slave-trade-of-Africans.jpg|width=450px]] 아메리카 항해는 기간도 최소 한 달 이상인데다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는 장거리 항해 자체가 목숨을 건 여정이었기 때문에, 한번에 최대한 많은 노예를 수납하기 위해 위 사진처럼 노예를 실었다. 이 배에 실려있던 식량들은 당연히 항해사들을 위한 식량이 대부분이었고, 아프리카 노예들은 이러한 상태에서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한 달 이상을 버텨야 했다. 다만 이건 배 자체의 적재량의 한계와 노예를 최대한 많이 실으려는 욕심 때문이고, 노예는 살려둬야 가치가 있는 거니 간신히 목숨만 연명할 정도로라도 먹을 것을 주기는 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죽으려고 입을 꾹 다물고 음식을 거부하는 노예들이 나오면, 노예상들은 시뻘겋게 타오르는 석탄을 쇠집게로 집어 얼굴에 들이대서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한 다음, [[푸아그라|목구멍에 금속 깔때기를 쑤셔박아서 음식을 쳐넣는]] 잔혹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비참한 항해 과정에서 지독한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바다에 뛰어들거나 상처를 일부러 곪아들게 만들어 자살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노예들이 사망하였지만, 절반만 살아남아도 남는 장사였던 관계로 저것보다 더 심하게 적재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위의 사진은 꽤나 깨끗하게 재현한 것이지만, 저렇게 쇠사슬로 한 달간 묶어놓았으니 당연히 대소변도 저렇게 누운 채로 봐야 했다. 당연히 아래칸에 있는 노예는 그 대소변을 다 몸으로 받아내야 했고, 그렇지 않아도 쇠약해져 있는 몸은 병에 걸려 죽어나갔다. 대표적으로 영국에서 1781년 Zong호라는 배에서 400명의 노예를 싣고 서아프리카 상토메에서 자메이카로 가던 도중 선장의 실수로 기항지를 놓쳐 항해가 길어져 식량과 물이 부족해졌다. 본인들의 살길은 물론이고 이 노예들은 화물로서 보험처리가 되었는데 후에 병으로 죽은 노예들에 대한 배상도 걱정되어 약하고 병든 노예들 중 133명을 골라 바다에 던져버려 그대로 익사시키게 만들었다. 후에 법정은 이들한테 죽은 노예의 소유주에게 화물에 준하는 배상금을 지불하는 걸로 다소 가벼운 처벌을 내렸지만, 후에 영국에서 노예제 폐지를 논의하는 큰 사건이 되었다. 노예제의 역사와 함께 노예 탈출의 역사도 시작되었다. 1526년 현재의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 동쪽에 위치한 스페인 정착지에 노예로 잡혀와 있던 아프리카 흑인 한명이 탈출한 것이 미국 대륙 최초의 노예 탈출이다. 원주민 족의 보호를 받았다고. 영국의 초기 식민지였던 제임스타운이 1622년 원주민들에게 습격당해 파괴됐을 때 백인들은 살해됐으나 흑인들은 원주민들에 합류했다. [[18세기]]~[[19세기]]에 들어서면서 [[체로키]], [[세미놀]] 족 등의 [[아메리카 원주민]]도 흑인 노예를 부리며 플랜테이션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다만 이 경우는 경제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이 백인 국가와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로부터 정당한 문명국으로 인정받기 위해 정부를 구성하거나 심지어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했지만 미국은 무시했다.[* 여담으로 이러한 원주민들의 노예제 행위는 남북전쟁이 터지자 자기들끼리도 노예제 문제로 의견이 갈려 분열되는 원인을 낳는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서 흑인 노예무역은 사그러들게 되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유럽에서 열대농산물 수요가 늘어나 아프리카 현지에서 생산 및 조달하기 위해 노동력이 필요해졌고, 인권의식이 커지면서 아프리카인들은 자주 집단반란을 일으켜 노예주들이 관리하기 어렵게 되었다. 노예무역의 악폐가 널리 알려지면서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더이상 아프리카인을 함부로 다루지 말자는 여론이 커졌다.[* 정작 아프리카 현지에서는 흑인 부족들이 다른 부족들을 포획해 유럽과 아랍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아먹었다. 노예를 매매한 부족은 노예로 팔린 부족에게 지금까지도 인종주의적 우월 의식을 지니고 있다.] [[1807년]] 영국이 노예무역을 불법화하고[* 노예 자체를 금지하는 급진적인 방법보다 노예무역을 금지시켜 공급을 완전히 끊어버리면 얼마 뒤 노예제 자체가 메리트를 잃고 자연스레 소멸하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노예제 폐지에 대해서는 Amazing Grace가 잘 묘사하고 있다.] 노예무역 단속을 시작하자 영국의 압박을 받은 프랑스나 스페인, 네덜란드도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단속에 동참한다. 이후로 노예무역은 음성화되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미국 남부에서는 이에 대해 노예간의 통혼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흑인노예를 대폭 늘려 공급 중단에 대처했으나 결과적으로 50년쯤 지나자 노예제의 이익 상실과 수가 급격히 많아진 흑인들에 의한 '''해방 운동'''과 미 정부에 의한 노예제 폐지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1833년]] 영국을 시초로 [[1847년]] [[오스만 제국]][* 탄지마트 이후 노예제 금지가 논의되기 시작했고 1847년에 이스탄불과 바스라에 설치된 노예시장을 철거하고 노예거래를 금지했다. 다만 이 조치는 중앙정부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에 한해서 시행되었으며 1854년에 카프카스 지역에서, 1857년에는 북아프리카 속주에서 노예제가 금지되었다. 다만 아라비아 반도를 비롯해 변경에서는 몰래 노예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제2차 입헌혁명(1908년) 이후에야 사실상 제국 내 모든 지역에서 노예제도가 사라지게 되었다.], [[1848년]] 프랑스, 스페인어권 라틴아메리카에 이어 [[남북전쟁]]으로 미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다. 이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노예제도 폐지가 되고 이들은 자치구에 합류했다. [[2000년대]] 들어 자치구들에서 흑인들의 거주를 금지하는 안건들이 통과되었으나, 법원과 미국 정부가 반대하여 논란 중이다. [[1886년]] 쿠바, 마지막으로 [[1888년]] [[5월 22일]] 브라질에서 노예제가 폐지됨으로서 모든 서구 국가에서 노예제가 사라진다. 그 이후로 서구 열강들이 새로 차지하는 모든 식민지에서 노예제가 폐지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