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예무역 (문단 편집) === 대서양의 노예무역 ===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노예무역은 '[[대서양]] 노예무역'일 것이다. 이는 [[서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노예무역이 근대 이전까지 이루어진 가장 최근의 사례인 데다, 가장 거대한 규모였기 때문이다.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인한 아프리카 흑인의 강제 이주는 인류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으며[* 출처: [[https://www.un.org/en/events/slaveryremembranceday/background.shtml|유엔 - 노예제를 기억하며]]],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인한 부정적인 여파는 현대에도 지속되고 있다. 아프리카 흑인이 아메리카 대륙 개척을 위한 노예가 된 이유는 [[바야돌리드 논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직접적으로 얽혀있다. 1550년에 벌어진 이 논쟁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은 이성과 문화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노예로 삼거나 가혹한 처우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그 대신 사람이 아니라고 간주한 [[아프리카]] [[흑인]]을 아메리카 대륙 개척을 위한 노예로 부리기로 했다.''' 당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특히 서아프리카 지역은 농노제와 유사한 방식의 노예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한편 당시 유럽은 [[가톨릭]]에서 같은 가톨릭교도를 노예로 삼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에 노예제가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었다. 대신 [[농노제]]가 있었다. 물론 잉글랜드인이 아일랜드인을 노예로 만들고 매매하기도 하는 등 같은 가톨릭교도끼리 서로 노예로 삼는 행위가 대놓고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금지였다. 그러다 포르투갈인이 아프리카를 통해 대대적인 노예무역을 시작한다. 아프리카 부족 중에는 포르투갈과의 교류를 통해 [[머스킷]]과 같은 [[총]]을 얻은 곳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들의 세력 확장 및 유지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고, 이들 아프리카의 여러 세력은 무기를 얻기 위해 농노 및 포로를 노예로 제공하였다. 이후 포르투갈인은 아프리카에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아프리카의 식민지화와 노예무역으로 인한 인력 손실 등으로 인하여 아프리카의 토착 세력의 힘이 약해지며 노예무역은 더욱 가속화되게 된다. 때문에 ‘무역’이 힘들어지고 사고 파는 구조가 흐릿해지자, 본격적인 납치를 시작하여 총기로 무장한 [[용병]]을 이용해 아프리카 부족들을 위협하여 노예선에 실었다. 당연히 노예선이 어디로 가는지는 말을 안 했고 노예들을 태운 배들은 바다 너머로 홀연히 사라진지라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는 “백인들은 [[식인종]]이라 우리를 먹기 위해 잡아간다”, “그들이 신고 있는 검은 가죽 신발은 사람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주로 중노동에 써먹기 위해 조달한 노예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노예의 성별도 [[남성]]이 압도적이었고 [[여성]]도 적으나마 꽤 있었다. 그래서 노예를 싣고 가는 화물선의 기항지 인근의 아프리카 지역은 [[여초]] 현상이 심각했다. 1519년부터 1860년대 말까지 950만명의 흑인 노예가 아메리카로 이동당했다. 중간 항로의 사망률은 15%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를 통해 1,100만 여명의 인구가 아프리카를 떠났음을 의미한다. 초창기 포르투갈인과 아프리카인의 노예무역은 대등한 관계였고, 아프리카인들이 수에서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인들이 함부로 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점점 더 많은 노예가 필요하게 되자 결국 이 두 세력 간의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포르투갈인들은 안정적인 노예공급을 위해 이들을 정벌하기도 했고, 새로운 정복지를 개척해 통치하는 것으로 해결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앙골라]]다. 중계상에서 완전한 공급자로 변신한 것이다.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노예무역은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1526년부터 1867년까지 약 1,250만명의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아프리카를 떠났고 약 1,070만명이 아메리카에 도착했다. 아메리카 대륙 이외에도 다른 곳으로 팔려갔지만, 항해 도중 죽임을 당하거나 죽은 노예들이 많다. 아래 사진은 노예선이 노예들을 어떻게 실어 날랐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대소변도 묶여있는 그 자리에서 그냥 보게 하는 것이었다 한다.(그래서 위에 있을수록 '그나마'좋은 환경이었다 한다. 아래로 갈수록 위쪽의 배설물을 뒤집어썼다.) 이렇게 위생환경이 열악했고 영양도 충분히 공급되지 못했으니 전염병이 돌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노예선의 경우 질병이 퍼지기 쉬워 노예선 선원들의 사망률도 다른 선박보다 높았다. 어떤 경우에는 배에 실은 노예 중에서 절반 정도만 살아 대서양을 건넜으며, 그래도 노예상인 입장에서는 이득이었다고. 서울대학교 주경철 교수의 '테이레시아스의 역사'에 당시의 노예무역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파일:attachment/Transatlantic-slave-trade-of-Africans.jpg]] 다만 저런 상태로 한 달 내내 실려있었던 것은 아니고 낮 동안에는 갑판에 보내 바닷물로 씻게 하고 그동안 선원이 노예가 묶여있던 자리의 대소변들을 청소해야 했다. 16세기 기준 대서양을 이동하는 노예의 사망률은 20~30%였다면 19세기에는 6~10% 정도로 감소하는데 19세기 기준으로는 장기간 항해하는 사람들에게 [[괴혈병]]을 예방할 목적으로 레몬과 식초가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노예무역 자체의 수익률이 50~100%이기는 하지만 아프리카의 노예자체가 매우 싸기에 그로인한 수익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노예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설탕의 수익이 매우 컸다. 18세기 플랜테이션에서 걷어들이는 설탕과 같은 작물의 가치는 매우 높은데 면적이 불과 28,000m²인 아이티에서의 수익이 당시 프랑스 예산의 70%를 차지했었다. 프랑스가 아이티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정글까지 다 없애면서 사탕수수 농장을 확보했으며 아이티가 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직전에는 무려 70만명이나 되는 흑인 노예가 있었다. 가장 전형적인 흑인 노예제 이미지는 [[남북전쟁]] 전의 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제이겠지만, 생도맹그나 브라질의 노예제는 그 열악한 상황과 노동 강도가 훨씬 악랄하여 노예를 정기적으로 새로 구입해야 하는 소모성 자원처럼 관리되었다. 또한 카리브해나 남미에서는 노예의 식사를 한가지만 제공해서 많은 노예들이 필수 영양소 결핍으로 잦은 질병에 시달렸기에 강제노동과 영양실조로 인해 노예들의 평균 생존 기간은 매우 짧았다. 브라질이나 [[아이티|프랑스령 생도맹그]], 바베이도스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노예는 과도한 노동과 질병으로 7~8년이면 사망했다.[* 출처 : 하버드 C.H. 베크 세계사 1350~1750 한국어 번역판 1022p 참조] 18~19세기 아메리카 대륙으로 수입된 흑인 노예의 10~20%는 무슬림이었다. 흑인 노예 중에 무슬림들은 종종 봉기를 일으키는 경우[* 실제로 브라질에서는 무슬림이 지도하는 흑인 노예 봉기가 있었으며, 생도맹그에서는 프랑수아 마캉달이라는 이름의 서아프리카 무슬림 출신 노예가 농장주 여럿을 독살하였다.]가 있었기 때문에, 식민지 수요처에 도착하는 즉시 개신교나 가톨릭으로 개종되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기 때문에, 식민지 농장에서 포르투갈어나 스페인어 등을 가르친 후 마름 일 등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종종 운이 좋아서 해방된 경우도 세대가 지나면서 결국은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