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예무역 (문단 편집) === 일본의 노예무역 === [[대항해시대]] 당시 [[유럽]]과 접촉한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 [[일본]]에서도 같은 [[일본인]]들이나 한반도에서 납치해 온 조선인들을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갖다 팔아버리는 경우가 매우 많았었는데 이는 당시 수출할 상품이 없던 일본이[* 이런 상황은 일본이 1853년 미국의 압력을 받아 막 나라의 문을 다른 나라들한테 열었던 19세기 중엽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가난한 농업 국가였기 때문에 해외에 내다팔 상품이 별로 없었고, 일본은 한동안 외국들과의 교역에서 무역 적자를 보았다. 그러다 나온 해결책이 바로 일본의 가난한 농촌과 어촌 처녀들을 해외에 성노예로 팔아 외화를 버는 일이었는데, 그렇게 해서 1920년까지 무려 60년이 넘게 [[가라유키상]]이라는 이름으로 30만 명의 일본인 여성들이 해외 각국으로 성노예가 되어 팔려갔다. 일설에 의하면 이 [[가라유키상]]들이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성매매를 하여 벌어들이는 수익이 일본 정부 연간 수익의 10%나 되었다고 하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일본 정부가 사용했던 전비에도 이 가라유키상들이 벌어오는 돈이 포함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일본 정부는 이런 가라유키상들이 외화를 벌어오는 애국자라고 추켜세우기까지 했으며, 근대 일본의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키치]]도 "매춘부의 해외 수출은 장려되어야 하며, 막아서는 안 된다."라고 긍정적으로 보기까지 했다.] 긴 전쟁 기간 동안 외국에 판 주력상품이 다름아닌 자국민 즉,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국시대 당시 일본은 농민[* 당시 일본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농노]]들이 노예처럼 의복 등에서 '노예상징'을 강요받는 등 노예에 가까운 취급을 받기도 했었다. [[https://blog.naver.com/marich77/40142694470|#]]]들이나 전쟁포로같은 자국 일본인들을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들마냥 해외에 노예로 팔아먹는 사례가 아주 많았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저술한 '일본사'에서도 16세기 규슈지방의 노예사냥 현장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전국시대 전쟁이 터지면 [[아시가루]] 등 잡병들이 침략지의 농민들을 상대로 일명 란보도리(乱妨取り) 또는 란도리로 불리우는 인간사냥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노예사냥을 해왔다. [[https://www.japanese-wiki-corpus.org/history/Ranbodori.html|#]] 노예사냥과 인신매매는 전쟁에 참여하는 아시가루들의 궁극적인 목표였으며 이는 전국시대의 아시가루들은 부족한 급여의 대안으로서 적지에서의 약탈을 합법적으로 인정받아 자신들이 침략한 침략지의 주민들을 잡아서 노예로 팔아 먹는 것이 귀중한 수입원이었기 때문이다. 잡힌 주민은 여성들은 [[창녀]]로 팔려나갔고 노인과 어린이와 남자는 노동력이 부족한 마을에 노동 노예로 팔려나갔다. [[https://hono.jp/sengoku/ranbodori/|#1]] [[https://hajimete-sangokushi.com/2019/09/10/%e6%88%a6%e5%9b%bd%e9%97%87%e4%ba%ba%e8%ba%ab%e5%a3%b2%e8%b2%b7/|#2]] 이러한 노예 판매는 일본이 통일되기 전에 세상을 하직한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등의 간토지방의 유력 가문들이 [[인신매매]] 1, 2위를 다투며 이들에 있어 노예 매매는 주요 수입원이기도 하였다. 노예가 존재한 만큼 전국시대에는 분쟁의 희생양으로 대신 처형당하는 해사인(解死人)이라는 슬픈 존재도 존재하였다. 전국시대에는 마을과 마을이 물싸움 등에서 무기를 들고 큰 분쟁을 빚기도 했다. 1592년, 셋츠국(摂津国)의 나루오 마을(鳴尾村)과 가와라바야시 마을(河原林村) 사이에 농업 용수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나면서 치열한 전투로 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천하는 통일되었으므로 제멋대로 전투를 벌인 두 마을에 대해 히데요시는 격노해, 책임자를 불러내 [[책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을에서 처벌 대상으로 바친 사람은 쇼야(庄屋: 촌장)나 명주(名主)가 아니라 이때를 위해 마을이 돌보던 거지들이었다고 한다. 이런 존재를 해사인이라고 하는데, 거지나 떠돌이 같은 정규 마을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마을에서 몇 명 길러 두었다가 마을에서 큰일이 일어났을 때 책임자 대신 내놓아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이들의 존재 가치를 보았을때 일본내에서 노예로 팔린 사람들도 이 해사인들과 똑같이 제물로서 바쳐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https://hajimete-sangokushi.com/2019/09/10/%e6%88%a6%e5%9b%bd%e9%97%87%e4%ba%ba%e8%ba%ab%e5%a3%b2%e8%b2%b7/|#]] 전국시대의 악폐인 이런 노예 사냥으로 잡힌 일본인들은 일본 내에서만 판매되지 않았다. 16세기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선박들이 세계의 항구에 출현한 [[대항해시대]]였으므로, 일본인 노예는 노예 매매를 통해 유럽에도 판매되기에 이른다.[* 일본인을 유럽인들에게 노예로 수출하는 움직임은 포르투갈인들이 처음으로 [[타네가시마]]에 표착한 1540년대 후반 무렵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https://www.jstor.org/stable/25066328|#]] [[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Eo0gEsTEWdMJ:www.tufs.ac.jp/common/is/kyoumu/pg/pdf/244_romulo_youshi_e.pdf+&cd=6&hl=ko&ct=clnk&gl=kr|#]] [[https://www.amazon.com/Portuguese-Modern-Studies-Global-Slavery/dp/900436580X|#]] [[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QBnMYK10m0oJ:www.daishodai.ac.jp/~shimosan/slavery/japan.html+&cd=1&hl=ko&ct=clnk&gl=kr|#]] >「我が旅行の先々で、売られて奴隷の境涯に落ちた日本人を親しく見たときに は、こんな安い値で小家畜か駄獣かの様に(同胞の日本人を)手放す我が民族への激しい念に燃え立たざるを得なかった。」 > >"우리가 여행하는 곳마다 팔려나가 노예 신세가 된 일본인을 가까이 보았을 때는 이런 값싼 값에 작은 가축이나 짐승처럼 (동포인 일본인을) 놓아주는 우리 민족에 대한 격렬한 생각이 불타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 >「全くだ。実際、我が民族中のあれ ほど多数の男女やら童男・童女が、世界中のあれほど様々な地域へあんなに安い値でさらっていって売りさばかれ、みじめな賤業に就くのを見て、憐憫の情を催 さない者があろうか。」 > >"사실 우리 민족의 저만큼 많은 남녀라든가 동남동녀가 세상의 저만치 여러 고을을을 그렇게 싼 값에 휩쓸려가서 팔아치우고 비참한 천업에 종사하는 것을 보고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 > - [[덴쇼 소년사절단]]의 회화록 중에서 [[https://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7RIj_cXFWVoJ:https://www.nikkeyshimbun.jp/2009/090410-62colonia.html+&cd=2&hl=ko&ct=clnk&gl=kr|#]] [[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QBnMYK10m0oJ:www.daishodai.ac.jp/~shimosan/slavery/japan.html+&cd=1&hl=ko&ct=clnk&gl=kr|#]] 이것은 1582년(덴쇼 10년) [[덴쇼 소년사절단]]이 해외에서 직접 목격했던 일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https://hajimete-sangokushi.com/2019/09/10/%e6%88%a6%e5%9b%bd%e9%97%87%e4%ba%ba%e8%ba%ab%e5%a3%b2%e8%b2%b7/|#]] 이러한 해외로의 일본인 노예 판매는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인 노예들을 해외에 헐값에 팔아넘기고 그 대가로 [[조총]]과 [[화약]]등을 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화약 100kg = 노예 20명 같은 식으로 교환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포르투갈인들은 중국인과 일본인 같은 아시아인들에 대해서 지성과 근면 같은 좋은 자질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노예로서 선호하였다고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Slavery_in_Japan|#]] 이러한 측면에서 볼때 일본인 노예들은 유럽에 도착한 최초의 일본인들로 간주되고 있으며, 1555년 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포르투갈은 다수의 [[일본인]] [[노예]] [[소녀]]들을 매입하여 [[성노예|성적인 목적]]에서 포르투갈 현지에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https://ja.wikipedia.org/wiki/%E3%83%9D%E3%83%AB%E3%83%88%E3%82%AC%E3%83%AB%E3%81%AE%E5%A5%B4%E9%9A%B7%E8%B2%BF%E6%98%93|#]] 그 당시 일본인 노예는 이러한 성적인 이유 탓인지 남자보다 여자가 더 선호되었으며 행선지는 [[고아(인도)]]를 중심으로 한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이지만, 포르투갈 본국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https://www.nikkeyshimbun.jp/2009/090410-62colonia.html|#]] 가령 시마즈 가문의 팽창 당시 오오토모 가문이 자신들의 영지였던 붕고 지방을 빼앗기면서 붕고 지방의 농민들은 대규모 노예사냥의 희생양이 되었다. 붕고 지방의 농민들은 노예 상인들에 의해 헐값에 히고 지방으로 끌려갔으며, 이렇게 수많은 노예들을 싼 값에 확보한 노예상인들은 시마바라 반도(16세기 일본인 노예 수출의 전진기지였다)로 이동시켰다. 노예들은 바로 이 일대에서 [[캄보디아]] 상인, [[태국]] 상인,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헐값에 [[인도]], [[필리핀]], [[마카오]] 같은 아시아 지역들 뿐만 아니라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같은 중남미 지방에 이어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유럽 지역으로까지 전세계 각국으로 팔려나갔다. [[https://www.youtube.com/watch?v=hTJn4KzxItI|#]] >"일본인 수백명 남녀 불문하고 남만선(유럽인들의 배)에서 사들여, 짐승처럼 손발에 쇠사슬을 묶은 채 배 밑바닥으로 몰아넣었다. 지옥의 가책보다 심하다. 중략.. 게다가 우마(牛馬)를 사들여, 살아생전 껍질을 벗기고, 중(서양인 선교사를 가리킨다)도 제자도 손을 써서 먹고, 부모 형제도 무례한 법, 축생도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 >("日本人が数百人、男女問わず南蛮船に買い取られ、獣のごとく手足に鎖を付けられたまま船底に追いやられた。地獄の呵責よりひどい。 ──中略── その上、牛馬を買い取り、生きながら皮を剝ぎ、坊主(宣教師を指す)も弟子も手を使って食し、親子兄弟も無礼の儀、畜生道の様子が眼下に広がっている……") >---- > - 『규슈어동좌기(九州御動座記)』 이 당시 해외로 팔려나간 일본인 노예들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당시 히데요시의 측근이자 히데요시의 규슈 원정에까지 같이 동행하였던 오오무라 유키(大村由己)가 일본인 노예가 서양인들에 의해 나가사키항에서 노예 매매로 대량 연행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는 자신의 저서인 『규슈어동좌기(九州御動座記)』에서 위와같이 분개하여 쓴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배 한척 당 약 200명 정도'''로 실은 것으로 추정된다. [[https://www.nikkeyshimbun.jp/2009/090410-62colonia.html|#]] 추정치이기는 하지만 해외로 끌려간 일본인 노예는 포르투갈 출신 노예 상인들이 주도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그 피해자는 '''대략 5만명'''에 이른다고한다. 하지만 덴쇼 10년(1582년)에 로마에 파견 된 [[덴쇼 소년사절단]] 일행이 세계 각지의 가는 곳마다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 노예로 착취 당하고 있는 모습들을 목격한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5만명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일본인 노예들이 전세계로 팔려나간게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하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 [[https://toyokeizai.net/articles/-/411584?page=4|#]] 당연하지만 오오무라 유키는 자신이 목격한 서양인들에 의한 일본인 노예 매매의 끔찍한 참상을 히데요시에게 보고하였고, 히데요시는 격노해, 즉시 포르투갈 출신으로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료(Gaspar Coelho)를 불러와 '''"왜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렇게 열심히 기독교 포교에 기를 쓰고, 그리고 일본인들을 사서 노예로 배에 끌고 가는가?(何故ポルトガル人はこんなにも熱心にキリスト教の布教に躍起になり、そして日本人を買って奴隷として船に連行するのか)"'''라고 왜 그런 심한 짓을 하느냐고 직접 추궁했다. 하지만 코엘료는 '''"파는 사람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다"'''라고 대답하였다. 결국 코엘료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일본인 노예 매매에는 판매자 역할을 하던 일본인들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어떤 형태로든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이웃의 일본인이, 자식을 팔고 부모를 팔고 처자를 판다(近所の日本人が、子を売り親を売り妻子を売る)'''」라고 하는 막장 상황도 있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로 「규슈어동좌기(九州御動座記)」에 그러한 실상이 기록되어져 있다. [[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QBnMYK10m0oJ:www.daishodai.ac.jp/~shimosan/slavery/japan.html+&cd=1&hl=ko&ct=clnk&gl=kr|#]] 이러한 일본인 노예 매매는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고수하는 원인이 되었다.[* 히데요시 초기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이어받아 [[천주교]]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는데, 추방령을 내린 동기로는 [[일본]]의 천하인으로서 일본의 전통 종교인 [[불교]]-[[신토]]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생겼다는 것, [[규슈]] 정벌 중에 [[구마모토현]] 아마쿠사 제도(熊本縣 天草諸島) 지방에서 일본 백성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행태를 목격한 사건이 주로 꼽힌다.] 비록 선교사들이 노예 무역에 부정적이었으며, 실제로 '''1598년에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 노예 무역을 파문으로 위협하여'''[* [[역사스페셜]] [[https://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09-0419&program_id=PS-2011177101-01-000&broadcast_complete_yn=Y&local_station_code=00§ion_code=05§ion_sub_code=08|2012년 3월 8일 방영분]]. 31분20초-33분45초]''' 제재할 정도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긴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인과 서양인 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던 선교사의 포지션이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선교사를 의심할 동기를 준 것이다.[* 「발리냐노{{{-2 (Alessandro Valignano, S.I., 1539~1606))}}} 입장에서는 관백의 정치적인 태도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1587년의 첫 추방령은 더 큰 광풍에 대한 경고로 보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상인들의 행동도 선교사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아시아 거점지인 마카오와 일본을 오가며 비단과 무기 등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싣고 갔다가 은, 수공예품과 향신료를 싣고 왔는데 거기에는 일본인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관백]]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승리의 카드’인 포르투갈인들과의 무역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들과의 무역을 위해서는 신부들이 일본에 있어야 했다. 일본인들은 신부들이 없으면 포르투갈 상인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91353|김혜경. 〈왜란 시기 예수회 선교사들의 일본과 조선 인식 - 순찰사 알렉산드로 발리냐노의 일본 방문을 중심으로 -〉]]] 결국 [[대항해시대]]가 막을 열었던 16세기 국제 노예시장의 네트워크에 일본도 포함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임진왜란]]때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 일부가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 [[베니스의 개성상인]]은 픽션이지만, 실제 조선인 포로 중 일부가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렸다는 것은 검증된 역사적 사실이다.] [[https://muse.jhu.edu/article/781183/summary|#]] [[https://brill.com/view/journals/jemh/24/2/article-p187_6.xml?language=en|#]] 이후 일본에서 이러한 노예무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제재를 받게 된다. >"[[명나라|대당]], [[유럽|남방]], [[조선|고려]]에 [[일본인]](日本人)을 매견(賣見: 팔아서 보내는것)하는 일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曲事(くせごと): 부정한 일 = 범죄)이며 덧붙여, 일본에 있는 사람을 매매하는 일을 정지시킨다. 굳게 정지하지 않으면 엄벌해야 할 자이다." > >大唐、南蛮、高麗え日本仁(日本人)を売遣候事曲事(くせごと = 犯罪)。 付(つけたり)、日本におゐて人之売買停止之事。 右之条々、堅く停止せられおはんぬ、若違犯之族之あらば、忽厳科に処せらるべき者也。 >---- >(伊勢神宮文庫所蔵 「御朱印師職古格」)[* (이세신궁문고 소장 「어주인사직고격」)] 1587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러한 상황에 위기감을 느끼고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한 일본인의 노예매매를 금지시켰다. 동시에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들에 대해서도 노예매매를 금지하는 취지의 명령을 내렸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 정벌 이후 일본인 노예들의 국제 매매를 금지하면서 발령했던 행동지침 중에는 [[중국]], [[포르투갈]], [[조선]] 등에 일본인 노예 판매를 금지한다 라는 문구 또한 있었다. 일본을 통일한 사람으로서 자국민을 노예로 해외에 판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히데요시의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조치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노예매매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포르투갈 상인이 직접 일본인을 구입하지 않았더라도 국내에 노예들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노예매매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실제로 일본에 있었던 포르투갈인 선교사는 동포 상인의 일본인 노예매매를 매우 싫어하여 본국에 단속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당시 포르투갈의 국왕이었던 [[세바스티앙 1세]](Sebastião I)는 1570년 9월 20일에 일본인 노예매매 금지령을 내렸으나 효과는 없었다고 한다. (세바스티앙 1세(Sebastião I)는 포르투갈의 노예 무역이 규모가 커져서 일본에서의 가톨릭 개종에도 그로인한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1571년에 일본인들을 대상으로한 노예 무역의 중단을 명령한 것이었다.[* Nelson, Thomas (Winter 2004). Monumenta Nipponica (Slavery in Medieval Japan) . Vol. 59 . Sophia University .. p. 463][* Jōchi Daigaku. Sophia University (2004). p. 463]) 당시 이러한 현상을 한탄하며 포르투갈의 석학 안토니오 베이라는 이렇게 말하였을 정도였다. '''"법이란 것은 있어도 위반자는 끊이지 않는 법이다. 예를 들어 일본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 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국내에는 다수의 일본인 노예가 존재하는 사실에 의해 이를 증명할 수 있다."'''[* 『入門』百六十五頁] [[https://www.nikkeyshimbun.jp/2009/090410-62colonia.html|#]] 결국 1595년 포르투갈은 중국과 일본 출신 노예들의 매매를 완전히 금지하는 법을 통과 시켰지만 계약 및 계약 노동의 형태로 강제 노동이 지속되었으며,[* 넓게 보자면 이건 일본인 노예 뿐만 아니라, 갑오개혁 이후에도 천민 출신들이 사실상의 머슴살이를 해야 했던 구한말 조선과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원주민 노예 문제 등 곳곳에서 일어나던 일이다. 가령 스페인 제국의 경우 무자비한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16세기에도 노예제가 불법이었으며, 19세기의 미국 남부처럼 법적으로 노예가 용인된 사회가 아니었으며, 다만 법적인 꼼수로 사실상의 노예제가 존속하는 사회였다.] 심지어 일본 노예 여성들은 1598년 문서에서 포르투갈 예수회 소속인 Luis Cerqueira가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에서 무역하는 포르투갈 선박에서 일하는 유럽인과 아시아인 또는 아프리카 선원들에게 [[성노예]]로 팔리는 경우마저도 있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Slavery_in_Japan|#]] 노예매매 금지령은 그 후에도 종종 발령되어 에도시대에 들어서는 1626년에도 금지령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노동력이 필요한 수요가 있고, 인간을 노예로서 파는 데 이익이 되는 공급이 존재하는 이상 이 악폐를 뿌리뽑기는 어려웠다. 결국 노예매매가 사라지는 것은 쇄국에 의해 자유교역이 제한된 것과 전쟁이 끝나고 인구가 늘어나 노동력 부족이 대부분 해소되어 매매가 상업적으로 성립되지 않을 때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https://hajimete-sangokushi.com/2019/09/10/%e6%88%a6%e5%9b%bd%e9%97%87%e4%ba%ba%e8%ba%ab%e5%a3%b2%e8%b2%b7/|#]] 그런가 하면, 조선에서 일본인 노예를 사들이는 일도 꾸준히 있었다.[[https://cafe.daum.net/historywar/2LjP/1874|#]]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810021_003|왜인 노비를 사는 것을 금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210017_004|도망갈 것을 우려하여 왜노(倭奴)를 궁벽한 곳에 옮겨 두게 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ka_13407101_002|전주 판관 유서종이 왜인을 끌어들여 말썽을 일으키다]] 심지어 고려시대에는 일본(日本) 상인 100여인이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고려(高麗)로 들어갔다가 고려에서 그 재화를 모두 빼앗고(...) 원나라에 표문을 올려 일본인들을 전부 다 노비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한 경우도 있었다. [[http://db.history.go.kr/id/cnkb_060_0800_0010|고려에서 표류한 일본상인을 노비로 삼기를 요청하다]] >'''"일본 정부는 인신매매와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리아 루스 호가 쿨리들과 맺은 계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창녀의 인신매매는 무엇입니까? 그녀들은 어릴 때 돈으로 팔려서 가혹한 조건 아래 [[요시와라 유곽|홍등가]]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일본인 창녀의 매매가 합법이라면, 페루인 선장의 행위도 합법적인 것이 되지 않습니까."''' >----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영국인 변호사 디킨스의 변론 >'''"설사 [[요시와라 유곽|창녀 매매에 의해 예증될 만한 노예제가 일본에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노예를 국외에 내보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청나라인 노동자를 요코하마에서 국외로 이송하려 한 페루인 선장의 행위는 위법이다."''' >----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특명재판장 오오에 타쿠(大江卓)의 판결 이와별개로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까지 [[요시와라 유곽]]에서 일하던 일본의 [[유녀]]들도 사실상 매매되는 [[성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는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일본측의 판결문에서도 이들이 사실상 매매에 의해 예증될 만한 성노예임을 인정한것을 보면 일본내에서도 이들을 사실상의 매매로 인해 탄생한 성노예라고 판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근대화 시절인 [[19세기]] [[메이지 유신]] 무렵부터 [[20세기]]인 1920년까지 일본에서는 [[가라유키상]]이라고 하여 규슈 지역의 가난한 여자들 30만 명을 해외에 [[성노예]]로 팔아넘기기도 했다. [[https://blog.naver.com/marich77/40202878241|링크1]], [[https://m.blog.naver.com/donmany0203/30170986586|링크2]], [[http://enjoyjap.egloos.com/1924854|링크3]],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52970|링크4]] 이와별개로 [[요시와라 유곽]]에서 일하던 일본의 [[유녀]]들도 사실상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는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일본측의 판결문에서도 이들이 사실상 노예임을 인정한것을 보면 일본내에서도 이들을 노예라고 판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