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정윤 (문단 편집) === 프로 시절 === 이런 유망주인 노정윤을 놓치고 싶은 프로팀은 없었다. 졸업이 다가옴에 따라 어디에서 지목할 지 귀추가 주목되었지만, 노정윤은 조금 다른 선택을 한다. [[J리그]]의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입단한 것. [[산프레체 히로시마]]는 이전에 마쓰다 자동차라는 이름으로 JFL(일본 실업축구 리그)에서 J리그로의 출범을 꾀하면서 외국 선수 수집에 열을 올렸는데, 이때 레이더망에 걸린게 노정윤[* 다만, 여기엔 약간의 비화가 있는데, [[김병수(축구인)|김병수]]가 원래는 91년부터 가계약이 되어있었으나 김병수의 재기가능성이 의심스럽자 계약 해지를 통보하고 새로 찾은 선수가 바로 노정윤이다.]이었다.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3658344|드래프트를 거부한 노정윤]]은 드래프트 거부 문제와 함께 왜 하필 일본팀으로 갔냐는 비난에 직면했다. 이 문제는 [[전북 버팔로|완산 푸마]]의 문제로 넘어가는데, 같은 해 함께 드래프트를 거부한 [[정재권]]은 완산 푸마가 가진 1차 지명권 때문에 지명이 확실시 되어서 협상에 들어갔으나, 해결이 되지 않자, 드래프트를 거부했으며, 노정윤은 차순위 지명이 자신이므로, 같은 이유로 거부했다고 한다.[* 정작 이 해의 1순위 지명은 [[독일]]에서 귀국한 [[황선홍]]에게 돌아갔으며, 그것도 [[포항 스틸러스]]와의 트레이드가 사전 합의된 것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이들이 2차로 완산 푸마에 지명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런 불안한 드래프트를 받기보단 외국무대에 대한 도전을 하기로한 노정윤은 일본으로 진출해 첫 시즌부터 주전으로 활약한다. 2번째 시즌에도 [[소포모어 징크스]]따위는 씹어먹고 10골을 기록하며 산프레체 히로시마의 준우승에 기여했으며, 1995년, 1996년 2연속 [[천황배]] 준우승에도 기여했다. 그리고 이때의 활약으로 1994년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된다. 1997년에 12경기 출전에 그치면서 퇴단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보는데, 1998년 1월 [[네덜란드]]의 [[NAC 브레다]]로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4305110|이적]]하게 되었다. 계약 기간은 1년 6개월에, 연봉은 70만 마르크(약 6억 8천만원)이었다. [[허정무]]에 이은 2번째 [[에레디비시에]] 한국인 선수였다. 데뷔전에서부터 골을 넣으며 활약을 기대하게 하는데, 여담으로 이 당시 같은 팀에 있던 선수가 [[라데 보그다노비치]]였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뛰고 온 후 부상으로 인해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자, 계약을 해지하고 새로운 팀을 알아보기 시작하는데, 그 팀은 [[황선홍]]이 뛰고 있던 [[세레소 오사카]]였다. 이후엔 [[윤정환]]과 [[김도근(축구)|김도근]]과도 한솥밥을 먹게 된다. 2000년 올스타, 2001년 후기 올스타에 선정되는 등 맹활약 했지만, 리그 성적이 좋지 않아 감독이 외국인 선수 교체를 요구하면서 [[김도근(축구)|김도근]]/노정윤과의 재계약은 하지 않게 되면서 새 팀을 알아보게 되었다. 당시 노정윤과 접촉한 팀은 [[울산 현대]]였다. 계약조건은 1년 임대에 이적료와 연봉 포함, 15만달러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8&aid=0000086856|구체적인 사항]]까지 언급될 정도로 이적을 앞두고 있었으나, 9년전 드래프트 거부의 파동으로 인한 제약이 걸리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울산 현대]]는 [[울산 현대미포조선]]에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5&aid=0000066534|입단하는 대체 방안]]을 내놓았지만, 노정윤 측에서 거절했고 결국 [[아비스파 후쿠오카]]로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5&aid=0000069123|이적]]했다. 하지만 [[아비스파 후쿠오카]]에서의 생활이 순탄치는 않았다. 잔여 시즌을 뛰었지만, 약체였던 아비스파는 결국 J2리그로 강등되고 말았고, 노정윤은 2002년에도 계속 아비스파의 선수로 활약했지만 [[http://news.hankyung.com/article/2002041329858|대표팀 유니폼 훼손]] 사건 등 서포터즈와의 충돌로 인해 시즌 종료 후 팀을 떠났다. 마침 노정윤을 묶었던 규정도 폐지되면서 다시 [[K리그]] 진출을 타진하던 노정윤은 [[이안 포터필드]]가 지휘봉을 잡은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0303793|부산 아이파크]]로 이적하게 된다. 여기서 [[안양 LG 치타스]]와의 경기에서 23초 킥오프 슛을 넣으며 리그 최단기록을 갱신하기도 하고, 2004년에는 30경기 4득점 6도움을 올려 부산의 첫 FA컵 우승에도 이바지한다. 그리고 2005년, [[김정남(축구인)|김정남]] 감독이 지휘하는 [[울산 현대]]로 이적하게 된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풀 타임 출전은 무리고, 후반 교체로만 35경기에 출전하면서 [[이천수]]나 ~~[[최성국(1983)|최성국]]~~ 등 크랙형 선수들의 교체 선수로 게임을 조율해 나가며 5개의 도움을 기록했다. 그리고 울산은 리그 우승을 하게 되며, 노정윤은 여기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이후 2006년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4월 16일 리그 경기에서 [[K리그]] 통산 100경기를 달성한 뒤 선수 명단에서 제외되면서 은퇴를 준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