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누벨바그 (문단 편집) === 거장들 === [[파일:/pds/200910/14/73/e0022573_4ad51c80e304c.jpg]] * [[프랑수아 트뤼포]] 1932년 2월 6일생. 학생시절부터 영화를 즐겨보았던 그는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의 시나리오를 쓰는 것으로 영화계에 입문하고,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과 인연이 있긴 했다.)[* 아들 수준의 가까운 관계였다. 이런 관계는 나중에 트뤼포가 장 피에르 레오의 양아버지 같은 역할을 하면서 그의 영화사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장 피에르 레오는 후술될 400번의 구타의 주연 배우이며 지속적으로 트뤼포 영화에서 페르소나 수준으로 많이 출연한 배우이다.] 자전적 영화 <[[400번의 구타]]>를 만들기 시작했다.(여기서 장피에르 레오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누벨바그 감독들 중에서 가장 열정적인 영화광으로 유명. 또한 80세 이상 장수한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에 비해 단명했다. [[파일:external/pbs.twimg.com/BjvZtNjCQAA0PiE.jpg]] * [[장 뤽 고다르]] 1930년 12월 13일생. 기존 영화 방식에 반기를 든 것도 모자라서 자기 자신의 영화조차 혁명시킨 영화 역사상 최고의 혁명가. 그의 모든 작품의 스타일이 다 달라서 '고다르 스타일이란 스타일이 없는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며, 그래서 자신의 모든 영화가 나올 때마다 항상 새롭기에 '고다르라는 존재 자체가 누벨바그'로 평가받기도 하는 영화인. 시대를 앞선 감독이라고도 하지만, 너무 '난해하고 정신없다'[* 한마디로 줄이면 '소설처럼 설명하는 영화'가 아닌, '''카메라와 영화 장비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영상의 느낌으로 이루어지는 영화적인 이야기'''를 느끼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다. 처음부터 전통적인 영화 사조인 문학(소설, 희곡)적 서사([[내러티브]])를 배제하거나 최소화하고, 감각적 표현이나 영상과 음향의 충돌(혹은 조명과의 충돌, 영상끼리의 충돌)을 통한 미학을 추구한 감독이라서 고다르 영화는 영화의 줄거리나 전체적 내용을 이해하려 하는 것보다 영화 사이사이의 미학적 감각 혹은 철학적 메시지를 느끼려고 하는 방식이 오히려 훨씬 강한 예술적 경험을 주기 때문에 서사적 이해나 설명을 중점적으로 보고 그 위주로만 찾으려는 태도는 사실상 불필요하다. 그의 영화는 부드럽게 이어지는 서사구조는 될 수 없지만 강한 느낌과 메시지들의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부드러운 조합일 수는 있다.]는 혹평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그야말로 영화는 '카메라'가 찍는 것이고 영화는 단순한 '현실의 재구성'이나 '이야기의 표현'이 아닌 영상기법과 음향과 편집기법이 합쳐진 하나의 독립적 예술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강조한 혁명가적인 영화인이다. 순간의 미감을 추구하는 [[푼크툼]](반대 개념은 '스투디움'이라 한다.)을 강조하는 걸 추구하려 했다고 그의 영화를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영화를 문학, 미술, 음악 등과 동등한 하나의 독립된 예술 장르로 이해하고 강하게 추구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과 구별되는 '영화만의 속성'을 찾아서 표현하려고 항상 노력했다. 그렇다고 고다르가 서사적 흐름을 중시하는 연출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단지 획일적인 스타일을 반대한 것일 뿐이고, 그 획일적이지 않은 방식 중에서 그는 문학적 서사 구조를 탈피하여 영상과 음향을 중시하는, 다른 예술 장르와 구별될 수 있는 영화만의 스타일을 골라서 만든 것뿐이다. 서사적 흐름이 중요한 영화라 해도 그 속에서의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인 미학(촬영, 편집, 음향 기법)을 시도하거나 완성한 경우에는 항상 훌륭한 영화로 인정했다. 그래서 그런 독창적인 시도를 해온 선배 영화인들에 대한 존경심은 항상 표현했다. 평론가 시절에도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를 가장 좋아했고,(그가 살던 마을에 가 보려고 일본 여행을 간 적도 있다.) 그리피스나 무르나우, [[르누아르]], [[히치콕]], [[하워드 혹스]] 등 영화사에 남을 예술적 시도를 했던 위대한 영화인들에 대한 존경심을 항상 표현하고 있었다. 이들이 서사적이지 않은 영화를 만든 사람이 아니지만 그들만의 기법을 통한 영화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존경하고 좋아했던 것이다. 고다르는 단지 과거에 관객들이 좋아했던 영화들의 방식(쉽게 말하자면, 문학적인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것에만 목적을 두는, 그래서 다른 예술 장르에 대한 종속이라 생각한 제작방식)을 더 발전시키거나 바꾸려는 시도 없이 후세 영화인들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반복해서 쓰기만 하는 것을 비판했던 것이다. 그래서 누벨 바그 사조 이후에 여전히 내러티브를 강조하는 전통의 연출을 추구하는 후세 감독들조차도 영화 속 미학을 추구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연출, 촬영, 편집 기법들을 공부하고, 그 일부를 자신의 영화에 차용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그가 만들어 낸 흐름이 모든 걸 바꾸지는 못했지만 강한 영향을 준 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의 누벨바그에서의 절대적 위치때문에 각 영화관련 언론이나 단체에서 영화 사상 가장 중요한 감독들의 목록을 만들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누벨바그 작가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으며, 누벨바그 영화의 대표 작품 또한 <[[네 멋대로 해라]]>, <[[미치광이 피에로]]>등 고다르의 작품들. 2022년 9월 13일에 별세했다. [[파일:external/image1.findagrave.com/58570211_128474034801.jpg]] * [[클로드 샤브롤]] 1930년 6월 24일생. <[[미남 세르주]]>가 최초의 누벨바그 영화로 꼽힌다. 누벨바그 영화 중에서 가장 장르적인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으로 유명하다. 스릴러 물도 많이 만들었으며, 히치콕에 대한 존경심으로 유명하다. <[[도살자]]>나 1995년 영화 <[[의식(영화)|의식]]>, 2000년 <[[초콜릿 고마워]]>, 2003년 <[[악의 꽃]]> 후반기 3부작이 유명하다. 2010년 9월 12일에 별세했다. [[파일:external/pbs.twimg.com/CaDkxoRWcAAU0JL.jpg]] * [[자크 리베트]] 1928년 3월 1일생. 누벨바그 작가중에서 가장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어온 감독. 심지어는 [[장 뤽 고다르]]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극적인 구성이 많이 생략된다. [[네오 리얼리즘]]에 가까운 양상을 지니며, [[다큐멘터리]]와 극 영화의 중간에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 경향이 있다. 2016년 1월 29일에 별세했다. [[파일:external/donavanhall.net/er-portrait1.jpg]] * [[에릭 로메르]] 1920년 3월 21일생.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탐구를 중심적으로 다루는 감독. 남성과 여성의 관계라는 입장에서 발생하는 [[찌질이|찌질한]] 사건들을 자주 다룬다. 덕분에 한국의 [[홍상수]] 감독이 로메르의 후계자로 꼽히기도 했다.[* 실제로 홍상수는 스스로 에릭 로메르의 영화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직간접적으로 공공연하게 표현한 적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두 감독은 그 외에 많은 것들이 다르기 때문에 이 비교는 부적합하다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그 방향성은 약간 달라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 스타일이 에릭 로메르와 닮은 것은 프랑스 영화판에서도 인정하고 있어서 칸 영화제에 홍상수의 작품이 초대되어 좋은 반응을 얻는 등 김기덕 못지 않게 프랑스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감독중 하나가 홍상수이다.] <봄 이야기> 같은 대표작이 있다. 2010년 1월 11일에 별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