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능창대군 (문단 편집) === 능창군 추대 사건 === 능창군의 중부 [[광해군]]은 의심병이 심했다. 왕위 승계 과정에서 있었던 [[선조(조선)|선조]]의 견제와 신하들과의 대립 때문이었다. 그래서 즉위 후에 [[역모]] 고변만 있으면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옥사를 일으키고 피붙이들까지 죽였는데 이는 재위 중반으로 갈수록 더 심해졌다. 불행하게도 능창군 역시 이를 피할 수 없었다. 1615년(광해군 7년) 8월, 이른바 '능창군 추대사건'에 엮인 것이다. 야사인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이이첨이 속으로는 신경희를 꺼려서 제거하려 했다는 서술 그리고 대북파가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봉산옥사 계축옥사 해주옥사 같은 여러 역모 사건을 조작했기에 능창군 추대사건 역시 대북파가 역모 사건을 조작해 반대파를 탄압했다는 오해가 존재하나. 정사의 기록은 오히려 반대로 능창군 추대사건은 이이첨을 비롯한 대북 세력이 역모에 몰린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익산]]의 진사 소명국이라는 자가 있었다. 수안군수 신경희[* [[신립]]의 형 신잡의 아들.]와 친했지만 어떠한 일 때문에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다 신경희는 소명국을 죽이려고 윤길과 (신경희의 숙부 신할(申硈)의 사위였다) 모의해 소명국을 음행(淫行)을 고발했다 옥에 갇힌 소명국은 돌파구를 찾으려했다 뜬금없이 신경희가 장령 윤길, 정언 양시진 등이 신경희의 사촌 누이의 양아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반역을 꾀했다고 모함을 했다 그 근거로 신경희 일당이 임금의 관상과 명운, 국운 길흉을 멋대로 점을 치고는 능창군이 40년간 치평할 임금이라는 점괘를 내보인 것을 꼽았다. 신경희는 자신은 정인홍의 고제[* [[제자]]들 중에서 학식과 품행이 특히 뛰어난 제자[[https://dic.daum.net/word/view.do?wordid=kkw000018089&supid=kku000025366|#]].]이자 [[이이첨]]과 마음을 통하는 벗이며[* [[http://sillok.history.go.kr/id/koa_10708114_006|#]]] [[대북]](大北) 사람들은 비록 노예라 하더라도 역적질을 한 자가 한 사람도 없는데, 어찌 신이 하였겠습니까[* 이 말에 광해군이 어이가 없었는지 "대북 사람 중에 노예가 된 자가 누구인가?"라고 따지자 신경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709007_001|#]]]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소명국은 교활하고 구변이 있어서 소명국과의 대질에서 소명국의 말에 신경희가 쩔쩔매자 이에 광해군은 분노해 신경희를 엄하게 신문할 것을 명령하였다 신경희는 대북파의 일원으로 [[정인홍]]의 제자이자[* 이 때문에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인홍은 자신의 제자인 신경희를 구하기 위해 평번(平反, 피의 사실을 거듭 조사하여 공평하게 판결하거나 혹은 신중히 조사하여 [[죄]]를 가볍게 해 주는 것.)을 주장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709011_001|#]]] [[이이첨]]의 사람이었기에[* 광해군 일기와 https://sillok.history.go.kr/id/koa_11004106_003 《[[인조실록]]》의 기록에 신경희를 자기 집에 숨겨 두고 [[의금부]]가 수색하러 오자 거절하고 내놓지 않기도 했다고 한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3019_004|#]]] 평소 대북파는 역적 토죄를 일삼았기 때문에 유희분과 박승종을 비롯한 [[소북]] 세력이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였는데 [[박승종]]은 신경희의 옥사가 일어나자 "과연 역적이 가까이에 있었다"고 외쳤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이첨까지 옭아매려는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경희와 윤길, 양시진은 극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봉산군수 윤공과 백령첨사 윤숙이 [[인성군]]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고 고변했다. 윤공, 윤숙, 인성군은 유배를 가고 신경희는 형신하는 동안에 다섯 번이나 역변(逆變)을 고해 죽음을 늦추고자 하였으나 모두 이루어지지 않아 마침내 곤장을 맞다가 죽었고 윤길(尹趌)·양시진(楊時晉) 역시 신문을 받다가 죽었으나 끝내 자복한 자가 없었고 거짓 고변을 한 소명국은 풀려났다. 능창군도 역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이라는 누명을 씌어 잡혀와 [[창덕궁]] [[창덕궁 인정문|인정문]] 뜰에서 광해군에게 직접 심문을 받았고, 이후 잠시 옥에 갇혔다가 [[강화도]] [[교동도|교동군]]으로 귀양을 떠났다.[*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hpba&logNo=105791414]].] 유배지 생활은 혹독했다. 달아나지 못하게 귀양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심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형벌인 위리안치형을 받았다. 한마디로 집 울타리 곳곳에 가시가 박혀 있던 것. 뿐만 아니라 의금부도사 구시백(具峕伯)은 능창군의 목에 [[칼(계구)]]을 채워 작은 움직임조차 힘들게 하였고, 거기에다 두 끼만 먹는 밥도 [[석회수]]로 지어 도저히 제대로 먹을 수 없게 했다. 다행히 능창군과 같이 지내게 된 지역 주민 고봉생과 강화군청의 사동인 수생이란 아이가 자신의 밥을 덜어서 주었으나 이 역시 발각되어 수생은 능창군과 밥을 따로 먹게 되었다. 결국 참담한 [[학대]]를 견디지 못한 능창군은 1615년 11월 17일 유배지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 나이는 겨우 17세. 자결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미수기언》에서는 [[음독]]자살했다고 하고 《[[연려실기술]]》에는 [[영창대군]]처럼 아궁이에 불을 때었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과 《능창군묘지명》에는 목을 매 자결했다고 나온다.[* 출처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ihpba&logNo=105791414]].] 자결할 당시 수생에게 부모에게 고하는 글을 써서 전해주었다. 수생은 그의 [[편지]]를 바로 [[정원군]] 내외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흙 속에다 숨겨두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인조에게 올렸다. 참고로 인조반정 때 정원군은 이미 사망했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B%8A%A5%EC%B0%BD%EB%8C%80%EA%B5%B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