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브흐 (문단 편집) == 기원 및 역사 == || [youtube(-8_Jw4MqkNE)] || || 니브흐의 역사 및 문화를 소개하는 애니메이션 || 니브흐는 지금으로부터 약 12,000년 전에 자바이칼 지역에서 지금의 본거지로 이주해온 신석기인들의 후손으로 추정되며, 옛부터 [[퉁구스어족|만주-퉁구스]]계 종족, [[아이누]] 계열 종족 등과 교류하였다고 한다. 2016년 유전자 분석에 따르면 니브흐는 [[아이누]] 또는 그들의 직계 조상으로 추정되는 [[조몬인]]과 관련 있거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유전적 기여도는 27.2%라고 한다. 그러나 [[사할린 아이누]]와는 적대적인 관계였다고 한다. 또한 이후의 연구에 의하면, 6세기 경에 [[동유럽]]에 유입된 [[유목]] 민족인 [[아바르]]와도 유전적으로 동계임이 확인되어서, 이들과 동일한 민족으로 유력하게 추정되는 [[유연(민족)|유연]]과도 동계일 가능성이 커졌다. [[대한민국]]의 [[언어학|언어학자]]인 [[김방한]]은 몇몇 [[니브흐어]] 단어에서 [[한국어]]와의 유사성을 확인하고, 니브흐어가 한국어와 동계 언어거나 최소한 [[언어동조대]]를 이룰 가능성을 제안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니브흐족과 [[한민족]]이 같은 계통이거나, 어느 정도 문물 교류를 하던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이 설은 백제어와 신라어가 한국어족이 아니며 고구려어만이 한국어족이라는 가정 하에 나온 가설인데, 이 가설이 반도 일본어설의 일종이기는 하나 백제어와 신라어를 한국어족으로 보지 않는 가설은 현재는 거의 부정되는 추세기에 현재로서는 후속 연구를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고구려라고 해서 특별히 퉁구스계 유목민 유전자를 많이 받은 것도 아니고[* 고구려를 포함한 한민족의 조상은 집단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요하 농경민으로, 북방 퉁구스-몽골계 유목민의 비중은 미미하다. 한국인과 '유전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일본인이 다수의 요하 농경민의 후예인 야마토계와 소수의 조몬계로 이루어졌다는 걸 보면 명백하다. ] 니브흐가 처음 역사 속에 언급된 것은 13세기 [[몽골 제국]] 시절이었다. 당시 니브흐의 영역은 [[하바롭스크]] 북쪽 해안을 따라 투구르스키 만에서 아무르 강 하구에 위치한 니콜라이옙스크까지였고, 더 나아가 [[타타르 해협]]까지 꽤 넓은 지역에 분포해 있었으나, 국가를 세우지 못한 탓에 [[여진족]]을 비롯한 [[퉁구스|퉁구스계 민족]]들과 [[러시아인]]들에게 밀려나야 했다. [[러시아]]가 [[사할린]] 정복을 했을 때, [[카자크]]와 [[러시아인]]들에게 야삭과 식료를 징발당하고 이에 불복하다가 살해당하는 등 심하게 시달렸는데, 때문에 그들을 [[니브흐어]]로 [[악마]]를 의미하는 kinrsh라는 멸칭으로 불렀을 정도였다. 이후 러시아에서 범죄자나 정치범들을 [[시베리아]]와 사할린 등지로 [[유형#s-2|유배]]보낼 때, 이들이 의도치 않게 몰고온 [[천연두]], [[페스트]], [[인플루엔자]] 등의 전염병으로 인해 면역력이 없던 니브흐인들은 또 한번 고통을 당해야했다. 당시 러시아 식민당국은 이 범죄자들을 [[https://en.m.wikipedia.org/wiki/Katorga|사할린 카토르가(형벌 수용소)]]로 이송했을 때, 니브흐인들을 [[교도관]]으로 고용하여 탈옥수들을 추적하는 일을 주로 맡겼다고 한다. [[제정 러시아]]가 망하고 [[소련]]이 건국되면서 이때부터 민족명은 상술된 길략(Gilyak) 대신 니브흐(Nivkh)로 바뀌었으며 이들을 위한 자치구가 생기고, 1960년대까지 어업권을 허가받았다. 하지만 소련 시절에 [[콜호즈]]로 강제로 동원되고 제대로 된 농업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왜냐하면 니브흐 어부들은 땅에 쟁기질하는 것을 죄악이라 여기는 믿음 때문에 농업으로 전환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2류 소수집단으로 생활해야 했다. 그 결과, 전통적인 수렵채집 방식의 생활은 빠르게 사라졌으며, [[학교]]나 [[공공장소]] 등에서 [[니브흐어]] 사용을 금지당했고, [[러시아어]] 사용을 강요당해야 했다. 그래서 현재 [[아이누어]]처럼 사용하는 인구는 노년층 중에서도 몇 사람밖에 없으며 중년층은 그나마 알아듣지만 쓰지를 못하고 젋은이들은 아예 알아듣지도 쓰지도 못한다고 한다. 한편 1905년 이후 [[일본 제국]]이 남사할린([[가라후토청]]: 樺太廳)을 영유하게 됐지만 남사할린은 원래 니브흐족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 일본 제국에 거주하던 니브흐족은 100명 안팎이었다.[* 1935년 109명, 1940년 71명. 출처: 일본어 위키백과 ニヴフ] 가라후토청 치하의 니브흐인들은 일본식 성씨를 쓰는 걸 강요받는 등의 탄압을 받다가 일본 패망 이후 [[사할린 아이누]]처럼 일본인으로 간주되어 고향에서 쫓겨나야 했다. 패전 후 일본에서는 1966년 菅原幸助가 조사한 바 [[아바시리]]에 3가구, [[하코다테]]에 2가구, [[삿포로]]에 3가구 이렇게 30여 명이 거주했다. 50년 이상 지난 현재는 일본인으로의 동화가 완료되었을 것이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니브흐족 빈민층들은 급속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현재 사할린 북부에 사는 이들은 [[https://en.m.wikipedia.org/wiki/Sakhalin-I|Sakhalin-1]]과 [[https://en.m.wikipedia.org/wiki/Sakhalin-II|Sakhalin-2]]라는 거대한 해양 석유 추출 프로젝트로 인해 미래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