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쓰충 (문단 편집) === [[호법전쟁]] === 돤치루이 내각 복귀 이후 안휘독군, 장강순열사에 임명되었으며 [[1차 호법운동]]이 벌어져 [[쑨원]]이 광저우에서 호법정부를 세우자 돤치루이의 무력통일정책을 적극지지하여 [[호법전쟁]]에 참여, 1917년 11월 호남 전선에서 패한 돤치루이가 하야하고 [[왕스전]] 내각이 출범하여 호법정부와의 협상을 꾀하자 [[쉬수정]]의 사주로 [[차오쿤]], 장회지 등과 함께 텐진에서 독군회의를 소집, 남쪽과의 재결전을 주장하며 구체적인 출동병력의 수까지 제시하였고 이에 [[옌시산]], [[장쭤린]] 등 10여명의 독군들이 호응했다. 결국 1918년 3월에 돤치루이가 복직, 내전이 재개되었으며 [[우페이푸]]와 [[차오쿤]]이 지휘하는 정예부대가 호남성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했다. 하지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직예군벌]]이 더 이상 전쟁하길 거부하였고 이 때문에 니쓰충이 파견되어 [[청첸]], [[탄옌카이]]의 [[상계군벌]] 및 [[루룽팅]]의 [[계계군벌]]과 교전했으나 직예군벌의 대타로 투입된 [[봉천군벌]]도 군비 배분의 문제로 불만을 품어 장쭤린이 동삼성 순열사에 임명되자마자 전쟁에서 빠져버렸다. 1918년 10월 [[쉬스창]]이 대총통에 당선된 이후 장건, [[차이위안페이]] 등의 명사들이 전쟁 중지를 호소하고 [[량스이]] 등 교통계 인사들도 가세하였다. 1918년 10월 23일 [[슝시링]], 차이위안페이, 장건 등이 평화기성회를 수립하여 전쟁 중지를 호소하자 먼저 전 대총통 [[펑궈장]]이 이를 지지했고 니쓰충 역시 기존의 주전론을 버리고 주화론을 주장하면서 1918년 11월 호법전쟁이 종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