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닌텐도/역사 (문단 편집) == [[패미컴]]과 [[게임보이]]가 세계를 제패한 1차 전성기([[1983년]] ~ [[1990년]]) == 그 해 말, [[아타리 쇼크]]에 의해 북미 게임산업계 전체가 한 순간에 증발해 버릴 무렵, 닌텐도는 [[일본]]에서 게임에 필요한 부분 밖의 기능은 모두 없애서 성능을 극대화시키고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를 중시한, 그 유명한 '''[[패밀리 컴퓨터]]'''를 발매했다. 이때 닌텐도는 당시에 PC 및 아케이드 게임 개발을 하던 몇몇 일본 회사들을 세컨드 파티로 영입했다. 그리고 [[1985년]], 패미컴의 북미/유럽판인 닌텐도 엔터테인먼트 시스템, 즉, '''[[NES]]'''를 출시함으로써 닌텐도는 [[아타리 쇼크]]의 폐허 위에서 솟아올라 세계 비디오 게임 산업의 왕좌에 오르게 되었다.[* 원래 닌텐도는 아타리를 통해 패미컴을 미국 시장에 유통하려 했고, 이미 협상도 [[1983년]] [[5월]] 경 완료되어 사인만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몇 달 후 발생한 비디오 게임 시장 붕괴의 여파로 [[아타리]]는 물론 모회사인 [[워너 브라더스]]도 손 쓸 수 없는 경영위기에 빠지면서 계약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되자 닌텐도가 단독으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https://www.youtube.com/watch?v=2q5_RgSCjBo|#]]] 이 때 닌텐도는 직접 먼저 게임을 테스트해서 일정 이상의 품질을 만족하는 게임만 Seal of Quality 마크를 붙이고 닌텐도 라이선스를 주는 방식([[서드 파티]] 제도)을 도입하는 등 전체적인 게임의 질을 보장하는 것으로 저질 게임에 의해 붕괴된 상황에 몰린 비디오 게임 산업과 가정용 게임기 시장을 다시 살려내었다. 즉, [[아타리 쇼크]]로 거의 사장된 가정용 게임기 업계는 충분한 관리만 따르면 명품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선례를 보인 것이다. 덕분에 서구권에서는 닌텐도를 '''비디오 게임 산업을 살려낸 [[구세주]]'''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패미컴 시절에는 [[상표의 보통명사화|닌텐도라는 명사가 게임기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였다]]고 하니, 그 당시의 열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 [[MP3]] 플레이어를 브랜드 불문하고 '''[[iPod]]'''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한국에서 빵 사이에 [[마시멜로]]를 넣고 [[초콜렛]]으로 코팅한 과자를 '''[[초코파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일례로 [[바트 심슨]]은 [[https://youtu.be/qF-DVr74eVQ|노래]]에서 우린 돈을 걸고 닌텐도를 했어(played Nintendo for cash)라는 말을 했으며, [[브루스 윌리스]]는 허드슨 호크라는 영화에서 좋아하는 여성에게 나랑 닌텐도 할래요?(play Nintendo with me?)라는 대사를 했다. 즉 대중문화에서 닌텐도란 단어가 게임이란 뜻으로 쓰이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1989년]], 닌텐도는 [[게임 & 워치]]의 노하우를 활용해 [[요코이 군페이]]의 주도로 개발된 '''[[게임보이]]'''를 출시해 휴대용 게임기 시장도 완벽하게 평정한다. 경쟁기종으로 [[아타리 링스]], [[세가]] [[게임 기어]]가 있었으나, [[게임보이]]와 비교하면 [[태풍]] 앞의 산들바람에 불과했다. 이 시기, 닌텐도는 [[테트리스 저작권 분쟁]]으로 유명 퍼즐 게임 [[테트리스]]의 휴대용 게임기 라이센스를 획득하는데 성공했고, [[게임보이]]와 번들 판매함으로써 기존 게이머들 이외에도 많은 인구를 게임계로 끌어들였는데, 심지어 [[미국]]의 제41대 대통령 [[조지 H. W. 부시]]도 [[게임보이]]를 소유했다고 한다. [[게임보이]]는 [[1995년]]까지 [[미국]]에서만 1,500만대가 넘게 팔리는 대흥행을 기록했으며, [[2003년]] 단종될 때까지 [[게임보이 컬러]] 등의 시리즈를 포함, 누적 1억 1,800만대 이상 팔렸다. 여담으로, [[패미컴]], [[게임보이]], [[슈퍼 패미컴]]까지 연이어 히트한 [[1990년대]] 초반의 닌텐도는 경상이익만 이미 1천억엔을 넘는 회사였는데[* [[1990년]] [[9월 13일]]의 발표에 따르면 매출 4,400억엔, 경상 이익 1,270억엔], 당시 [[삼성]], [[LG]](당시 금성), [[대우그룹|대우]], [[현대그룹|현대]] 등의 한국 10대 그룹 경상이익 총합을 다 합쳐도 닌텐도에 못 미쳤다고 한다. 한국 입장에서는 사원 700여명 남짓의 '작은' 기업에서 애들 장난감이라 생각하던 게임기 하나로 이정도의 결과를 내놓자 새삼 거대한 일본의 경제력과 닌텐도라는 회사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서[* 당시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게임기]]는 [[완구]], 즉, 어린이용 장난감으로 간주되었기에 아동용 상품을 제작해 판매하는 회사의 수익이 그 정도라는 사실이 희귀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주력사업군에서 어린이용 장난감이 차지하는 비중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삼성전자]], [[현대전자]], [[인켈|해태전자]] 등에서 게임기 사업에 발을 들인 계기가 된 것 같기도 한데[* 한국대기업이 게임기 사업에 발을 들인 것은 이것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대우의 [[재믹스]]가 있다. 한편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 문서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하드웨어 성능 하나만 갖고는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게임기 산업이다. [[엑스박스]]가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게임 개발자들이 게임 제작할 수 있는 개발환경의 조성, 즉,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닌텐도라는 회사는 일본 내에서도 신기한 대우를 받았다. 단적으로 당시에 비슷한 매출을 기록한 [[후지쯔]]만 해도 사원수가 5만여명이었으니. 사원 1인당 경상 이익이 1억엔대인 회사는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당시 잘 나가던]] 일본 내에서도 가장 처음이자 거의 유일한 기록이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