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중세 === ||[[파일:다마스쿠스 포위.png|width=530]]||[[파일:다마스쿠스 동문.jpg|width=500]]|| || 이슬람 군대의 포위망 (밥 투마 = 토마스 문 혹은 동북문) || 이슬람 군대가 입성한 밥 샤리키 (동문) || >{{{+1 بسم الله الرحمن الرحيم، من محمد رسول الله إلى الحارث بن أبي شمر، سلام على من اتبع الهدى، وآمن به وصدق، وإني أدعوك إلى أن تؤمن بالله وحده لا شريك له، يبقى لك ملكك }}} > >진리를 따르는 자에게 안녕을 고하며, 그에게 안전과 정직이 있길. 나는 그대를 유일신의 종교로 초대한다. 그분께는 다른 동반자도 없으며, (이슬람을 수용한다면) 그대의 것은 그대에게 남으리. > >ㅡ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신의 이름으로, 신의 사도 무함마드가 알 하리스 빈 아비 샤미르에게 602년부터 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는 27년간의 대전쟁에 돌입하였다. 전자의 내분을 틈타 페르시아 군대는 610년 [[에데사]] 함락을 시작으로 612년까지 디마슈크 등 시리아 전부를 장악하였다. 항복 혹은 파괴라는 페르시아군의 겁박에 대부분 협상에 나선 결과였고[* 대표적 예시로 3주간 저항한 예루살렘은 대규모 약탈과 학살을 겪었다], 시리아에 만연했던 [[단성론]] 세력은 마침내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다만 6년에 걸친 [[이라클리오스]]의 반격으로 628년 디마슈크와 시리아는 동로마의 영토로 수복되었다. 대전쟁 동안 도시는 627년 일부 주민들이 이란으로 반출된 것 외에는 별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한편 두 제국이 싸우는 동안 아라비아 반도는 이슬람의 기치 하에 통합되었다. 628년에 [[무함마드]]는 중동 각지의 왕공들에게 이슬람 개종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수신자 중에는 동로마령 디마슈크 총독 하리스 알 가사니도 있었다. 이는 수용되지 않았고,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칼리파 [[아부 바크르]]는 634년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에게 시리아 정복을 명하였다.[* 629년 무타 전투를 보듯 무함마드 역시 헤자즈 지방과 지리적으로 연결된 시리아를 아라비아 반도 외의 첫 대상지로 삼았다. 그러나 아부 바크르는 우선 '성서의 백성'도 아니었고 동로마에게 패한 후 약화되었던 페르시아를 우선 침공하였다. 그러던 634년 초엽, 신흥 세력의 발호를 경계한 동로마는 과거의 적인 페르시아에 원군을 파견한 것을 계기로 이슬람 제국은 --계획대로-- 공격의 화살을 시리아로 돌리게 된 것이다] 그해 4월 디마슈크 근방을 지나 남하한 칼리드[* 이라크에서 사막을 횡단해 팔미라를 거쳐 디마슈크 동쪽 독수리 고개를 넘을 때에 초록 깃발을 꽂아 이슬람의 당도를 알림. 다만 친위대만을 대동한 상태였음으로 도시 자체를 공격하진 않고 주변 습격한 후 남하해 본군과 합류함]는 7월까지 동로마의 번국인 [[가산 왕국]]을 멸하며 요르단을 석권하였고, 아즈나딘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하였다. 이후 그는 '시리아의 낙원'으로 알려진 디마슈크로 진격하였다. 도시는 이라클리오스의 사위 토마스가 지키고 있었는데, 우선 그는 에메사에 있던 장인에게 원군을 청하고 칼리드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두 군대를 남파하였다. 그러나 칼리드는 이들을 각각 마르즈 앗 사파르와 야쿠사에서 격파하고 2만의 병력으로 디마슈크를 포위하였다. (8월 21일) 동로마 수비대 역시 1만 5천으로 적지 않았다. 동문 밖의 수도원에 진영을 차린 칼리드는 무리한 공성전 대신 도시를 봉쇄하고 기다렸다. 동로마 원군을 대비해 각지에 정찰대가 파견되었고, 동쪽 교외의 구타 오아시스는 포위군에 충분한 물자를 제공해주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라클리오스는 9월 9일에 1만 2천의 원군을 파견했으나, 정찰대의 보고를 받은 칼리드에게 격파되었다. 9월 중순, 기다림에 지친 토마스는 수비대를 이끌고 밥 투마를 나서 반격을 시도하였다. 로마군은 화살 세례의 엄호와 함께 진군했으나, 진두지휘하던 토마스가 오른 눈에 화살을 맞고 철수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천 배의 복수를 천명한 토마스는 밤을 틈타 재차 반격에 나섰다. 이번엔 군을 넷으로 나눠 주력군은 밥 투마를 나서 낮에 약화된 포위군을 공격하고 나머지는 서문, 작은문, 동문으로 출격해 다른 포위군의 밥 투마 방면 원조를 방지하게 했다. 칼리드를 생포하라며 호언장담하던 토마스였지만, 격전 끝에 칼리드와 기동대가 적재적소에 나타나며 포위군은 모든 반격을 격퇴해내었다. 토마스는 수천의 인명 손실을 입고 성내로 철수해 더이상 성밖에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11m 높이의 성벽은 아랍인들에게 익숙치 않은 장애물이었고, 병사들은 지쳐갔다. 하지만 동로마 진영은 단합되어 있지 않았다. 6세기부터 시리아에 퍼진 [[단성론]]은 정교회와 반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9월 18일, 한 단성론파 사제 요나가 그날 밤 축제가 있다는 사실을 칼리드에게 알려왔다.[* 배신의 대가로 그는 자신과 약혼녀(..!)에 대한 사면을 요구했다고 함. 기타 무슬림 기록에 의하면 약혼녀는 포위가 시작되는 바람에 그에게 넘겨지지 않았다. 따라서 평화가 필요했던 그는 최대한 빨리 칼리드에 접촉하였고, 나중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여러 기독교도들과 함께 도시를 떠나 안티오키아로 향했는데, 이에 요나는 칼리드에게 안티오키아로의 지름길을 알려주고 함께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마침내 그는 포로 중에서 약혼녀를 발견했지만, 그녀는 변절한 그에게 실망해 자살하였다고 한다. 칼리드는 요나에게 포로로 잡힌 동로마 황녀와 결혼할 것을 제안했지만 요나는 거절하였고, 이후 황녀는 헤라클리오스의 부탁에 따라 돌려보내진다. 2년 후 요나는 [[야르무크 전투]]에서 동로마군과 싸우다 전사한다.] 칼리드는 나머지 포위군에 알릴 새도 없이 휘하 병력만을 이끌고 동문을 습격하였다. 가장 요새화되어 있던 동문에 대해 방심한 수비 측은 성문 위엔 병력을 두지 않았고, 칼리드는 두 장교들과 맨손으로 그 위를 올라간 후 밧줄을 묶어 밑으로 내렸다. 대기하던 1백의 결사대가 성벽을 올랐고, 칼리드는 장교 알 카카와 안쪽으로 내려가 문지기들을 죽이고 동문을 열어젖혔다. 이후 시가전이 벌어졌는데, 전세가 기울자 토마스는 도시의 파괴를 막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다른 포위군이 부동인 것을 보고 칼리드의 독자 행보임을 파악한 그는 이슬람 군의 부사령관인 아부 우바이다에게 사절을 파견, 지즈야를 내고 항복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평화를 선호했던 아부 우바이다는 (칼리드 역시 동의할 거라 여기며) 제안을 수용하였고, 19일 새벽 밥 자비야(서문)을 통해 입성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