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정통 칼리파 조 ==== > (종말의 날이 당도한) 후에 이사 이븐 마리얌 (예수)이 디마슈크 동쪽의 백색 미나렛에 강림할 지어니 >ㅡ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 앗 나와스 이븐 시만 알 킬라비가 전함[* ثُمَّ يَنْزِلُ عِيسَى ابْنُ مَرْيَمَ عِنْدَ الْمَنَارَةِ الْبَيْضَاءِ شَرْقِيَّ دِمَشْقَ فَيُدْرِكُهُ عِنْدَ بَابِ لُدٍّ فَيَقْتُلُهُ ] [*출처 https://sunnah.com/abudawud/39/31] 칼리드와 달리 아부 우바이다는 다른 포위군에 전갈을 보냈고, 그들 역시 각자가 맡은 성문을 통해 무혈입성 하였다. 이후 아부 우바이다는 토마스를 포함한 동로마 장교 및 주교들을 대동하고 시내 중심부로 향하였다. 한편 새벽 내내 동문에서 전투를 벌이던 칼리드 역시 저항을 일소하고 시내 중심부로 진출하였다. 직선 거리의 개선문과 성 마리아 성당 쪽에서 양측은 마주쳤다. 칼리드는 자신이 무력으로 도시를 점령했다고 주장했고, 아부 우바이다는 협상을 통해 항복한 것이라 반박했다. 이어진 회의에서 사령부는 평화 협정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결정했고, 칼리드는 불만이었지만 수긍하였다.[* 사실 공성전 도중 즉위한 신임 칼리파 [[우마르]]는 칼리드를 해임하고 아부 우바이다를 총사령관으로 선임했는데, 칼리드가 숨기고 있었음으로 이 합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평화 협정에 따라 디마슈크 시민들은 (지즈야를 내는 한) 자유와 재산 및 종교의 자유가 존중되었고, 토마스를 비롯해 이슬람 지배를 피해 안티오키아로 떠나려는 이들에게는 3일의 기한이 주어졌다.[* 이후 비가 내려 토마스의 병력 및 난민들의 행렬이 지체되자 칼리드는 그들을 따라잡아 약속한 3일이 끝나자마자 공격해, 마르즈 알 데바즈에서 격파하고 토마스의 부인인 황녀를 비롯한 엄청난 전리품을 얻어 공방전 당시의 아쉬움을 달랬다.] 디마슈크의 상실 후 이라클리오스는 전방이 된 에메사를 떠나 안티오키아로 본부를 옮겼다. 다만 동로마는 쉽사리 도시를 포기하진 않았다. 634년 가을, 총사령관으로 진급한 아부 우바이다는 우선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정복을 명하였다. 이에 임시로 디마슈크를 맡았던 야지드 역시 소수의 병력만을 남기고 출정해 [[티레]]와 [[비블로스]]를 함락한 후, 팔레스타인의 주요 항구인 [[카이사레아]]를 포위하였다. 비슷한 시기 아부 우바이다는 칼리드의 주력군은 티베리아스 일대를 평정한 후 에메사로 향하였다. (635년 봄) 이슬람 군대가 분산된 것을 포착한 헤라클리오스는, 사령관 테오도로스에게 소수의 수비대만이 남겨진 디마슈크 탈환을 명하였다. 그 해 여름, 테오도로스는 남하하며 부관 스키노스에게 병력 일부를 주며 베카 협곡의 [[바알벡]] 구원을 맡기곤 자신은 곧장 디마슈크으로 향하였다. 도시 서쪽의 앗 사부라에 주둔하던 테오도로스는, 밤을 틈타 기습을 가하였다. 이는 좋은 계획이었으나 첩자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칼리드가 친위대를 이끌고 달려와 그를 격파하였다. 칼리드를 급파한 아부 우바이다 역시 베카 협곡(마르즈 알 룸)의 스키노스를 격파하였다. 이로써 동로마의 디마슈크 탈환 시도는 분쇄되었다. 그러나 이는 헤라클리오스가 준비한 역습의 서막에 불과하였다. 이슬람 군대가 에메사를 포위하는 틈에 대군이 안티오크에 집결하였고, 636년 5월에 남하하였다. 칼리드의 조언에 따라 아부 우바이다는 전 병력을 [[골란 고원]] 동쪽의 야르무크에 집결시켰다. 디마슈크의 주둔군 역시 주민들에게 지즈야를 돌려준 후 철수하였고[* 지즈야는 군 복무를 하지 않던 이교도들을 지켜준다는 보호세 명목으로 걷던 것인데, 더이상 보호해주지 못하니 돌려주라고 아부 우바이다가 지시한 것], 로마군은 2년 만에 도시를 재접수하였다. 그러나 이어진 [[야르무크 전투]]는 로마군의 대패로 귀결되었고, 디마슈크를 향해 도주하던 패잔병들은 칼리드의 기병대에 의해 섬멸되었다. 동로마 군대는 도시를 통과해 에메사에 다다른 후에야 재정비 할 수 있었다. 그해 12월, 칼리드는 2년 전과 같은 조건으로 도시에 입성하였다. 이 '두 번째 정복'으로 '하디스에 33번 언급된' 디마슈크는 확고한 이슬람 제국의 지배 하에 놓였다. 637년, 안티오키아의 함락과 함께 시리아 정복이 완료되자 이듬해 디마슈크 서쪽의 자비야에서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총사령관 아부 우바이다가 시리아 총독이 되었고, 야지드는 그대로 디마슈크 태수를 맡았다. 2년 후인 639년, 아부 우바이다가 역병으로 사망하자 칼리파 우마르는 시리아를 양분하였다. 홈스부터 자지라의 북부는 이야드 이븐 가님에게 주어졌고, 디마슈크와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의 남부는 야지드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해 말엽 야지드 역시 병사하자 동생 [[무아위야 1세|무아위야]]가 후임자로 임명되었다. 다만 팔레스타인은 우바다 이븐 앗 사미트에게 주어졌다. 무아위야는 형 야지드 때부터 우마이야 가문의 중심지가 된 디마슈크를 중심으로 삼았다.[* 시리아의 정식 중심지는 자비야였지만, 639년부터 우마이야 가문이 총독위를 독점하게 되며 그 가문의 거점인 디마슈크가 사실상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실 이슬람 정복 이전, 자힐리야 시대부터 이미 우마이야 가문은 히자즈-시리아 무역을 주도하며 시리아 남부에 어느정도 재산을 확보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마이야 왕조 역시 시리아를 중심으로 삼은 것이다] 640년, 무아위야는 우바다와 함께 동로마의 마지막 거점인 [[카이사레아]]와 [[아슈켈론]]을 함락하며 레반트 정복을 마무리지었다. 그 후 우바다는 [[아므르 이븐 알 아스]]의 이집트 원정을 돕기 위해 임지를 떠났다. 이듬해에는 홈스-자지라 총독 이야드가 사망하며 무아위야는 사실상 시리아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그해부터 무아위야는 동로마에 대한 지하드를 이끌며 그 심장부인 아나톨리아 습격에 나섰는데, 644년에는 반도 중서부의 아모리움까지 진출하였다. 한편 644년 무아위야의 숙부 [[우스만]]이 칼리파로 선출되었다. 우스만은 조카 무아위야의 임지에 팔레스타인을 더해주었다. 비록 홈스-자지라는 우마이르 이븐 사드가 봉해졌지만, 그는 경험이 부족한 20대였기에 사실상 무아위야가 시리아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마저도 3년 후에 우마이르가 해임되며 무아위야가 그의 영지를 차지하였다. 이에도 만족하지 못했던 무아위야는 [[바누 칼브]], 타이 등 신규 편입된 아랍 기독교도 병력의 봉급을 명목으로 군대 봉급을 위해 공유지로 남겨두었던 비옥한 북부 시리아까지 직할지로 요청하였다. 이를 우스만이 수용하며, 무아위야는 시리아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