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마스쿠스 (문단 편집) ===== 삼파전 ===== * 카르마트 (+ 익시드) vs 파티마 왕조 vs 동로마 제국 연공으로 인해 경제난에 처한 총독 하산은 혼란의 이집트로 향하여 5초 조카인 아미르 아흐마드의 섭정이 되었다. (968년 11월) 그러나 미래를 비관한 그는 이듬해 1월 말, 정예 병력 및 관료들을 대동하고 파티마 왕조의 침공이 임박한 푸스타트를 두고 시리아로 향하였다. 약 일주일 후 출병한 자우하르의 파티마 군대는 969년 여름 이집트를 정복하였다. 이에 하산은 디마슈크 대신 남쪽 라믈라에서 자우하르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그러자 카르마트가 재차 디마슈크를 공격했고 또다시 패배한 하산은 30만 디나르의 연공을 대가로 휴전 및 결혼동맹을 맺었다. 또한 카르마트 군의 일부는 파티마 조에 맞서도록 하산 휘하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970년 봄, 자우하르의 부관 자파르 이블 팔라는 익시드 군을 격파하고 하산을 사로잡았다. 이후 라믈라와 티베리아스가 점령되었고, 디마슈크 총독 샤물 역시 항복하였다. 그러나 베르베르 병사들이 주민 대표단을 홀대하고 절도를 범하자 시민들은 분노하였다. 디마슈크는 일종의 코뮌 (자치 정부)을 세우고 저항하였고,[* 압바스 가문의 아비 얄라과 일반인 무함마드 이븐 아수다가 대표로 선임되었다] 민병대는 자파르가 파견한 선발대를 격파하였다. 하지만 11월 자파르가 잔여 병력과 당도하자 민병대는 성안으로 후퇴하였고 곧 항복 의사를 밝혔다. 관용적이던 자우하르와 달리 자파르는 여성들이 먼지 속에 머리를 내리고 나오게 하는 등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었고, 베르베르 부대는 3일간 시장 거리를 약탈하며 주민들과 충돌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자파르는 주민 대표 무함마드 이븐 아수다의 형제 등 유력 인사들을 처형하였고 유사시를 대비해 시타델을 세웠다. 그후 자파르는 칼리파의 숙원 사업이던 동로마에 대한 지하드에 착수, 부관을 파견해 안티오크를 공격했지만 격퇴되었다. 같은 시기 카르마트의 하산 알 아삼이 재차 디마슈크를 공격하였고, 무함마드 이븐 아수다와 부근 베두인들 및 기존 익시드 병사들이 그에 합류하였다. 자파르는 출격하여 사막에서 이들과 맞섰지만 패하고 전사하였다. (971년 8월)[* 그 외에 파티마 조를 경계하던 부와이 왕조 및 함단 왕조가 도와주었다. 전투 후 무함마드 이븐 아수다는 자파르의 목을 베어 형제의 복수로 삼았다.] 25일 카라마트의 디마슈크 점령 이후 사원에서는 (비록 그들이 쉬아였음에도) 다시 압바스 칼리파의 이름이 예배에 언급되었고, 파티마 칼리파 [[알 무이즈]]가 저주되었다. 이듬해 하산 알 아삼은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고, 바레인으로 철수하였다. 973년, 알 무이즈의 카이로 당도와 함께 파티마 군은 재차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남부를 장악했으나 하산의 반격으로 축출되었다. 이듬해에 하산은 재차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자라흐 부족의 배신으로 또다시 패주하였다. 한편 975년 초엽 [[부와이 왕조]]령 이라크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한 알프타킨은 3백의 튀르크 병력과 시리아에 진입하였다. 같은 시기 동로마의 중흥을 이끈 [[요안니스 1세]]가 안티오크에서 시리아 원정에 나서자, 세력이 약화되던 카르마트는 알프타킨에게 디마슈크를 맡겼다. 동로마, 파티마 조 모두를 꺼리던 주민들의 환영과 함께 알프타킨은 디마슈크를 접수하였다. (975년 4월) 여름 무렵 홈스와 바알벡을 점령한 요안니스 1세가 다가오자 디마슈크의 민병대는 서북쪽 자바다니 고개 (바르다라 강의 상류)를 막았다. 단기간에 원정을 마무리하려 하던 요안니스에게 이는 부담스러운 장애물이었고, 공격 대신 막대한 조공을 요구하였다. 입지가 불안했던 알프타킨은 황제의 엄포에 겁을 먹었지만 액수가 부담스러웠기에 대신 그에게 안내자를 대동한 관광을 제안하였다. 그의 제안을 수용한 요안니스는 소수의 근위대만 대동하고 340여년 전 제국이 상실한 도시를 둘러보았다. 이에 만족한 것인지 요안니스는 병합을 포기하고 약속대로 순순히 철수하였다. 북방의 위협이 물러가자 이번엔 남쪽의 파티마 조가 디마슈크를 노렸다. 976년 7월, 대장군 자우하르가 도시를 포위하였다. 이에 시민들은 알프타킨을 도와 열정적으로 저항하였다. 이듬해 1월, 하산의 카르마트 원군이 접근하자 자우하르는 철수하였고 알프타킨과 하산은 추격에 나섰다.[* 다만 고령이던 하산은 라믈라 탈환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연합군은 라믈라를 거쳐 파티마 군을 추격, 아슈켈론을 포위하였다. 포위가 장기화되던 978년 4월, 자우하르는 알프타킨에게 가자 북쪽의 영토를 넘겨주는 휴전을 체결하였고 그 대가로 알프타킨은 파티마 칼리파 알 아지즈를 정통으로 인정하였다. 같은해 알프타킨은 이라크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이즈 앗 다울라와 그의 다일람 군대까지 받아들였다. 이에 그의 세력이 너무 강대해지는 것을 경계한 알 아지즈는 직접 대군을 소집하여 북상하였다. 과거 앗 타와힌 전투처럼 라믈라 부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초반 파티마 측의 좌익을 맹공하며 기세를 올렸던 아프타킨은 중앙 전열이 붕괴하자 2만의 전사자를 남긴채 패주하였다. 사막을 떠돌던 그는 과거의 동맹이던 팔레스타인의 자라흐 부족에게 구출되었는데, 그들은 며칠후 10만 디나르를 받고 그를 알 아지즈에게 넘겨버렸다. (978년 8월) 카르마트는 연공을 대가로 바레인으로 철수한 후 다시 시리아에 나타나지 않았다.[* 알프타킨의 능력을 높이 사던 알 아지즈는 그를 용서하고 튀르크 용병대장으로 삼았는데, 그를 시기한 재상에게 암살되었다. 카르마트는 이라크 방면에서도 985년 부와이 조에게 대패한 후 잠잠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